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다.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직접 만지고 조작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환갑을 넘긴 나이(62)를 무색케 할 정도다. 그만큼 그는 젊다. 호기심도 많다.

평소 인터넷 서핑을 통해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MP3 등 첨단 기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사무실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장거리 이동 때는 반드시 검은색 애플 아이팟을 챙긴다. 여기엔 자신이 좋아하는 팝그룹 아바의 노래가 가득하다. 해외출장을 갈라치면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전자제품 매장을 방문한다.

허 회장의 호기심은 업무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질문세례를 퍼붓는다. 키 182㎝의 말쑥한 허 회장이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질문을 던지면 임원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호기심은 출범 5년째를 맞은 GS그룹을 재계 8위로 단단히 세운 요인이 됐다.

◆자신에게 엄격한 원칙주의 CEO

호기심이 많다고 허 회장을 다소 엉뚱하거나 별난 CEO(최고경영자)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기상시간은 새벽 5시다. 일어나자마자 전날 읽은 책의 내용을 정리한다. 곧바로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운동과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한다. 이때가 오전 8시다. 이런 일과를 매일 반복한다. 한번 정한 룰은 쉽게 바꾸지 않고 철저히 지키는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엄격함은 골프 라운딩에서도 나타난다. 동반자들에겐 'OK'(컨시드) 주는 것에 관대하지만 정작 자신은 'OK' 받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신중하게 퍼팅한다.

철저한 건강관리도 엄격한 생활태도와 연관돼 있다. 건강관리 비결은 많이 걷고 움직이는 것이다. '마사이 운동화' 애호가인 그는 틈날 때마다 걷는다. 인터컨티넨탈호텔에 약속이 있으면 역삼동 회사에서 걸어서 이동한다. 운동량이 부족한 임원들에게 만보기를 나눠주며 걷기를 권하기도 한다.


◆알아주는 오페라 마니아

허 회장을 잘 아는 지인들은 그가 보기와 달리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전한다. 그의 감성 원천은 오페라다. 주변에서는 알아주는 오페라 마니아다. 그와 대화를 오래 하고 싶으면 오페라 얘기를 꺼내는 것이 좋을 정도다. 그는 국내에서 열리는 유명한 오페라 공연은 부인과 함께 꼭 챙겨본다. 지난달에는 '피가로의 결혼'을 관람했다. 아바 노래로 구성된 뮤지컬 '맘마미아'도 좋아하는 공연 중 하나다.

공연장뿐만 아니라 홈시어터로 오페라 DVD를 보는 것도 즐긴다. 오페라 아이다는 7번,라트라비아타는 5번이나 봤을 정도다. 허 회장은 "내가 즐겨보는 오페라는 대부분 이뤄질 수 없는 애틋한 사랑에 대한 내용"이라며 "TV 드라마는 줄거리 전개를 미리 예상할 수 있지만 오페라는 볼 때마다 순간순간 느낌이 너무 강렬해 줄거리보다는 장면에 심취한다"고 설명했다.


◆격식 따지지 않는 소탈함이 매력

허 회장은 자신에겐 엄격한 반면 남에게는 관대하다. 좀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스타일이다. 선한 인상과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는 악감정을 갖고 달려드는 사람의 마음조차 금세 돌리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경영활동에서도 소탈한 인간적 면모가 그대로 묻어난다. 집무실에는 비서실은 물론 비서팀도 따로 없다. 차장급 수행비서 한 명이 스케줄을 챙길 뿐이다. 출장도 수행비서 없이 혼자 훌쩍 떠나는 경우가 많다.

골프를 치러 춘천 강촌리조트에 갔다가 차가 많이 막힐 것 같으면 혼자 경춘선 기차를 타고 자택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4명이 밥 먹으러 가면 3인분만 시키는 습관에서도 낭비를 싫어하는 그의 성품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소탈하다 보니 말을 하기보다는 많이 듣는 편이다. 사장단 회의에서도 참석자들의 의견을 모두 경청한 다음에야 입을 뗀다. 일일이 업무를 챙기거나 꼼꼼히 관리하는 대신 업무 담당자에게 책임을 위임하고 일을 맡기는 스타일이다. 굵직한 사안에 대해서만 큰 흐름과 방향을 제시한다. 그가 '입보다 귀가 더 많이 열린 CEO'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 승부수는

2004년 LG그룹에서 계열분리한 GS그룹은 올해로 출범 5년째를 맞는다. GS는 계열분리 이후 자산이 18조7000억원에서 39조원(작년 말 기준)으로 209% 증가했다. 매출 규모도 23조1000억원에서 49조8000억원으로 216% 불어났다.

그룹의 사업은 본궤도에 올라 있지만 허 회장은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GS는 지난해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으로 당장 새로운 미래성장동력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다. 올 자산규모도 현대중공업(7위)에 밀려 8위로 한 단계 내려앉았다.

뿐만 아니다. 주력 사업인 에너지 · 건설이 모두 시황 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GS 직원들은 허 회장의 리더십을 믿는 분위기다. 허 회장은 신년사에서 "위기국면에서만 찾아오는 절호의 기회를 과감히 포착해야 한다"며 난국을 헤쳐갈 자신감이 있음을 내비쳤다.

허 회장은 그동안 좀처럼 외부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단에 합류,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예고했다. 그의 대내외적인 행보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