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지금 죽음을 소비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죽음을 텔레비전 화면 위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그리고 조금은 선정적인 해프닝으로 보는"(알바레즈 '자살의 연구')데서 나온다. 특히 잊을 만하면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는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은 우리 사회가 인간적인 삶을 향한 통로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차단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프로이트는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 있지 않다면 삶의 흥미는 줄어든다"고 했는데,이 말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죽을 정도로 열심히 해야 된다는 뜻이지 생의 무의미함에 투항하라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의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삶 전체를 도박에 건 흥미진진한 룰렛 게임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켜보듯 죽음을 대하고 있다. 최진실의 자살이 소문과 악성 댓글에서 비롯됐다는 것,또한 장자연의 죽음이 여성을 남성사회의 성적 장식품 정도로 여기는 전근대적인 사회지도층의 행태와 관련돼 있다는 것.우리 사회는 이들의 자살에서 마지막으로 도와달라는 행위로서의 극단적이지만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채 소문을 증폭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T S 엘리어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모든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는 희망으로 가득찬 봄이 어떻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 여기에는 어떤 역설이 들어 있다. 봄꽃 중에서 라일락은 가장 강렬한 꽃냄새를 지닌다. 그러면서도 또한 라일락꽃잎은 지나가는 봄비에도 허무하게 져내리고 만다.

이와 같이 봄은 모든 생명들이 삶을 희구하는 가장 강렬한 냄새를 발산하는 계절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욕망이 일순간에 꺾어지고 마는 허무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그러한 고뇌와 허무의 토양이 없으면 황무지에서 어떤 꽃도 피워낼 수 없다.

여기서 나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미국 시인 실비아 플라스를 떠올려본다. 32세의 젊은 나이에 가스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그녀의 생애와 작품 활동은 이미 하나의 문학적 신화로 자리잡고 있다.

그녀는 영국의 유명 시인이자 남편인 테드 휴즈가 자기의 여자 친구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자 1년의 별거 끝에 1963년 2월 부엌에 가스를 틀고 자살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살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실행한 삶의 통과의례였다.

그녀는 자신의 시에서 죽음을 10년마다 한 번씩 겪도록 숙명지어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녀는 자살하던 날 밤,다시 살아나기 위한 완벽한 계획을 짜고 의사의 전화번호까지 메모로 남겨두었지만 운명의 신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의도를 외면해버렸다. 즉 그녀에게 자살 시도는 배우자를 비롯한 질서화된 가부장적 사회의 크고 무거운 그림자에서 벗어나서,자신만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몸으로 통과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형태였다. 그것은 뱀의 허물벗기이자 거듭나기였고 자살을 통해 신생의 삶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였다.

자신의 시 '라자로 부인'에서 그녀는 '죽는 것은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한 강렬한 생의 의지를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생명의 가치는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 소중함을 깨닫기 어렵다. 이제 우리 사회는 연예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자살에서 도와달라는 외침을 들어야 한다.

자살이란 삶의 끝에서 행하는 마지막 선택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던지는 하나의 강렬한 메시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다시 삶의 세계가 시작되는 4월이 열리고 있다. 살기 위해서 죽음과 맞서는 것이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