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0일 오후 9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고(故)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의 아홉번째 사위인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이 조문객을 맞느라 빈소와 접객실을 바쁜 걸음으로 오가고 있었다. 이틀째 빈소를 지키고 있는 권 사장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문객 사이를 오가길 30여분.권 사장이 기자 앞에 잠시 앉았다. 목이 탔던 듯 물을 한 잔 들이켠 뒤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장인이 국제그룹 회장이란 걸 주변에 말하지 않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고인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권 사장의 눈으로 본 장인의 인생은 굴곡이 많았다. 양 전 회장의 아홉 번째 딸이 권 사장의 아내다. 결혼 후 양 전 회장은 "내 밑에 들어와 경영수업을 받는 것이 어떤가"라고 제안했지만 '처가 덕본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오히려 고집을 피워 1979년 LG전자에 입사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집(처가)에 들어와 같이 살지 않겠는가"란 장인의 권유를 뿌리치기 힘들어 처가로 이사해 8년간 양 전 회장을 모시고 살았다. 권 사장은 "그때가 참 좋았다"고 회고했다. "장인이 사업을 하셔서 마음대로 출장도 다니고 밤에 일하다 늦게 들어와도 아무 소리 없이 인정해주셨다"며 말을 이어갔다.

양 전 회장의 사업이 어려워진 것은 악재가 여러 차례 겹치면서부터였다. "1984년쯤입니다. 미국 유학 중이던 장인의 열 번째 자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하필 시신이 미국에서 들어오는 날 청와대에서 호출했어요. 일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눈까지 많이 내려 길마저 막혔죠.결국 약속시간에 늦고 말았습니다. "

이후에도 상황은 나쁘게 돌아갔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에 와서 호출을 했는데 양 전 회장은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늦게 참석했다. 권 사장은 "그 뒤 청와대가 정치헌금을 기부하라고 했는데 장인이 영수증을 달라고 하셨으니…"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권 사장은 "장인은 미운털이 박혀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회사를 다 빼앗겼다"며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때 알았다"고 했다. 1980년대 재계 서열 7위 기업이었던 국제그룹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던 권 사장은 그때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 "당시 대통령 참모진들이 (고인이) 청와대 모임 등에 왜 늦었는지를 설명이라도 해줬더라면…"이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양 전 회장은 노환에 따른 폐렴 증상으로 병원 치료를 받아오다 3월29일 오후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