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 목공예품을 한번 써본 사람은 1000년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을 빛깔에 반한다. 목재에 깊이 스며 있던 진한 갈색은 물에 씻기고 햇볕에 바래도 끊임없이 바깥으로 우러나오면서 은근한 빛을 잃지 않는다. 물푸레나무 박달나무 느티나무 등의 원목을 최소한 2년간 말린 후 틈새가 갈라지지 않은 것만 선별해 비 내리는 습하고 무더운 날을 골라 11번에 걸쳐 옻칠하는 등 총 110여차례의 손길이 간 결정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오래 쓴 그릇일수록 고색창연한 빛깔을 띤다.

대전시 대덕구 덕암동의 고려공예(www.koryo5837.com)는 김인규(74) · 김용오씨(47) 부자가 운영하는 전통 목기 제작업체다. 기제사를 모시는 가정에 한 벌쯤 있는 전통제기(祭器),스님들의 발우(鉢盂),납골함,가정용 식기,바둑판 등을 3대째 생산하고 있다. 김인규 명장(名匠)의 선친인 고 김갑진 옹(1896~1950)은 지리산 자락의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에서 살았다. 이곳은 물푸레나무 등 목기 제작에 적합한 나무가 풍부해 1900년대 초부터 목기 주산지로 이름을 날렸다. 놋쇠그릇이나 쇠문고리조차 군수물자용으로 수탈당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국적으로 목기의 수요가 크게 늘어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마을 이장을 맡았던 김 옹은 빨치산에 끌려가 몰매를 맞고 며칠 후 늑막염이 도져 사망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김인규 명장은 아버지로부터 3년 정도만 목기 제작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도 국군이 마련한 남원 실상사 내 창고에서 일제가 남기고 간 시설과 기자재들을 활용해 목기공예를 익힌 결과 1954년부터 자신이 만든 목기를 시장에 내다팔 수 있었다. 전주 공주 등지로 목기를 들고 나가 팔아도 이틀에 한 벌(당시엔 10개) 팔기도 빠듯했다. 한 벌이 쌀 두 되 값이었지만 여비와 제작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 삶의 터전을 대전으로 옮겼다. 시장이 넓어져 한 달에 30~50벌의 목기를 팔면서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목기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등 약 20년간 잘 팔렸다. 1970년대 후반 약 5년간은 플라스틱 제기가 유행했으나 그 경박함에 싫증을 느낀 소비자들은 소득 증가와 함께 목제 제기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제기 10벌(한 벌당 37개)씩,한 벌을 쌀 한가마니 값에 팔아 2남2녀를 대학까지 무난히 교육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줄고 저가 중국산 옻칠 목기가 들어오면서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 부자는 원부자재 전부를 국산만 쓰고 옻칠하고 말리는 데 95일 이상 걸리는 전통 제작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보급형 제기는 38만원 선,최고급품은 100만원 이상을 받는다. 반면 중국산은 제대로 마르지 않은 나무에 저급 옻칠 도료를 3~4번 분사해 쓱싹 만들기 때문에 5만~6만원에 불과하다. 게다가 일부 수입업자들은 중국산 제기를 한국에서 재포장해 국산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숱한 어려움이 있는데도 김 명장은 원칙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군대 3년을 빼고는 목기만 만들어왔고 아직까지 이 일 말고 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천직인지 몰라도 지금도 작품이 훌륭하게 나온 것만 보면 마음이 뿌듯합니다. 돈은 나중 문제에요. 장인이 돈만 좇으면 작품을 만들 수 없지요. 품질이 좋지 않으면 절대 시장에 물건을 내놓지 않아요. 선불을 받고 물건을 만드는 일도 없습니다. "그의 말에서 요즘 찾아보기 드문 장인정신과 순박함이 느껴진다.

목기 제작으로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 명장의 아들 용오씨는 2005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목기 계승자로의 전업을 선언했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유능한 공장설비 엔지니어로 인정받아 대전의 중견 화학기업 공장장까지 지낸 그가 돌연 사표를 낸 것."나이들수록,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어요. 더구나 아버지가 50년 이상을 바쳐 일군 전통을 어떻게 죽일 수 있나요. 최근에도 전 직장 사장님이 불러 공장으로 복귀하라고 요청했지만 갈 생각이 없습니다. " 용오씨의 의지는 결연했다. 이에 김 장인은 "아들이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운다기에 한사코 말렸습니다. 하지만 저 아이가 목공예에 홀린 걸 어찌합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목기제작을 조금씩 배우더니 요즘엔 길 가다가 괴이한 고목만 보면 주워다 다듬어 작품을 만들거든요. 그래도 지금이라도 공장으로 돌아가길 바라요"라며 눈물을 비쳤다.

용오씨는 전업 후 적잖은 시련을 겪고 있다. 지난해 4월엔 작업장에 누전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퇴직금과 적금으로 모은 돈 1억8000만원을 들여 사들인 원목과 애지중지하던 목기 2000여점이 타 버렸다. 또 서울의 100억원대 자산가가 아버지의 사진과 작품을 그대로 카피한 홈페이지를 만들고 중국산 저가 옻칠 목공예 제품을 팔다 들켰는데도 사과나 보상은커녕 오히려 수백만원의 광고비를 내라고 윽박지르는 씁쓸함도 겪었다. 요즘에는 아내가 자녀들의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시간제 아르바이트에 나가 마음이 괴롭다. 한때 절로 들어갈까 생각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예전 단골손님이 '목기를 20년 넘게 썼어도 빛이 난다'며 아버지를 잘 모시라고 당부할 때마다 목기 제작기술을 계승한 자부심을 느낀다"며 "입문했던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고 말했다.

대전=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