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다녀오겠습니다. " 젊은 직장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1980~90년대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식의 퇴근 인사가 유행한 적이 있다. 물론 농담이긴 하지만 특근이다 야근이다 하며 워낙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던 탓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말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살갑게 느껴졌다. 회사는 제2의 가정이었고 직장 동료들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가족이었다. 그 시절 직장인들은 이렇게 '회사인간' 생활을 하며 기업과 나라 발전의 주춧돌이 됐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지금 회사인간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 경기침체가 심화되면서 나이 50전후의 베이비부머들이 퇴출 1순위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퇴직 또는 정리해고 등의 형태로 소리소문 없이 밀려나 사오정(45세 정년)이니 오륙도(56세까지 근무하면 도둑)니 하는 유행어가 바로 그들의 현실이 되고 있다. 잡셰어링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인건비 부담이 큰 이들을 내보내고 대신 신규직원이나 인턴을 채용하겠다는 곳이 대부분이다.

베이비 붐 세대 입장에서는 사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동년배가 많은 탓에 학창시절엔 성적경쟁에 내몰리고,사회에 진출해서도 피말리는 생존경쟁을 벌이며 마치 일이 세상의 모든 것인 양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식 교육이나 집안 살림은 모두 마누라에게 맡기고 회사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그들이다. 그런 밑거름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으랴.그런데도 앞선 세대들처럼 고속 승진의 혜택도 누리지 못했고,군사독재에 항거했으면서도 민주화 주역의 공로는 386세대에게 양보해야 했던 그들이다. 그런데 또 조기은퇴라니 한숨이 나오는 건 당연한 노릇이다.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은 그래도 참을 만하다. 정작 문제는 은퇴 후가 막막하다는 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세대는 자기계발이다 재테크다 하며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투자하는 게 자연스런 일이지만 회사인간 체질에 물든 베이비부머들은 그런 요령도 부리지 못했다. 업무 외의 일에 관심을 쏟는 것을 곱게 보지 않던 사회적 분위기 탓이 크다. 그래서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자신이 늘 하던 일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다른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고 창업에 나설 용기를 내기도 어렵다.

보다 심각한 사실은 가진 게 너무 없다는 점이다. 자식들 학비를 대고 내 집 마련하느라 평생을 허덕였던 탓이다. 베이비 붐 세대가 속한 45~54세 가구주의 가구당 평균 금융자산은 2007년 말 현재 1312만원에 불과하다(한국은행 조사).평균총자산은 2억7638만원,부채는 5507만원이다. 금융자산 규모가 어느 연령층보다 적고 빚은 그 4배 이상에 달한다. 은퇴하면 당장 먹고살기조차 힘겨울 수밖에 없다. 주가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자산디플레 현상마저 가세해 걱정이 더하다.

베이비 붐 세대의 은퇴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청년실업도 문제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그들의 사정은 더욱 다급하다. 때문에 중장년층 일자리 창출 및 사회적 안전망 확충에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지금 논의 중인 30조원 규모의 슈퍼 추경에 이들에 대한 지원방안이 포함돼야 함은 물론이다.

베이비부머들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사장시키는 것은 국가경제적 차원에서 막대한 손실이라는 점을 생각해도 그러하다. 일본의 경우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1947~49년생)의 은퇴가 임박한 2006년 고령자 고용안정법을 개정해 60세이던 정년을 65세로 늘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는 점은 좋은 참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