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에 대해 역외 담합행위 조사를 벌인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곧 해당 기업들의 제재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삼성전자의 경우 유럽집행위원회 측에 D램 가격 담합 혐의를 인정했고,대한항공은 경쟁법 위반 판정과 관련한 청문절차를 마친 상태다.

자국민이 아닌 사업자들의 제3국에서의 영업활동에 대해 자신의 국내법을 적용해 제재를 가한다는 것은 일반적 법리에 비춰 이례적일 뿐더러 자칫하면 국가간 주권침해의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유럽연합의 경우 역외 지역에서의 행위에 자신의 경쟁법규를 적용하는 데 비교적 신중한 입장을 취해 왔었다.

그러나 근래 들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역시 글로벌 기업들의 역외 행위에 대한 제재에 공세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는 점점 대두되는 보호무역주의의 조짐과 맞물려 우리 기업들과 정부 차원에서 적극 관심을 갖고 대응해야 할 부분이다.

2차대전 후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에서는 거대재벌에 대한 해체작업이 벌어졌다. 1925년 합병을 통해 뭉쳤던 독일의 바이엘,훽스트,바스프사 등 화학공업분야의 회사들이 쪼개졌고 독일철강연합이 연합국위원회에 의해 갈라졌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일본의 중공업 재벌들도 해산의 운명을 피하진 못했다. 이 때 연합국이 쓴 무기가 바로 미국의 '반독점법'이었다.

오래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우리도 지난 참여정부에서 뉴스 시장의 독과점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특정 언론사들의 발목을 묶는 수단으로 생뚱맞게 공정거래법이 차용됐던 경험을 갖고 있다. 불공정 거래에 대해 엄격한 경쟁법 적용을 자랑하는 미국이 오바마 새 행정부 출범 직후에 '바이 아메리카' 정책을 내놓았다가 다른 나라들의 비난을 받은 것에서도 경쟁법의 숨어있는 다른 얼굴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당국이 미국이나 유럽연합 경쟁당국의 과징금 부과 조치를 해당 기업의 문제로만 돌려 수수방관하거나,해당 기업들이 지레 포기하고 유죄협상에 응함으로써 벌금이나 감면 받아 보고자 하는 태도는 모두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전자의 경우엔 경쟁법적 정의가 항상 글로벌 차원에서의 정의가 아닌,지역적 이기심의 추구일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고,후자의 경우엔 섣부른 유죄협상의 경우 스스로 위법사실을 자백함으로써 '줄소송'을 유도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놓치고 있다. 특히 문제는 유럽연합의 경쟁법 관련 규정이 중복 조사나 제소에 관해 따로 명시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경쟁법 위반행위에 대한 제재가 일회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될 수 있으며,심지어 유럽연합 차원이 아닌 각 회원국들 차원에서 이중 삼중의 제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은 법률의 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선 안 되지만 법의 정의도 여유가 있을 때 한결 살아나는 법이다. 경기가 잘 돌아갈 때는 괜찮지만,세계적 경제침체기에는 법률이 자국우선 정책의 보조적 수단화될 소지가 많고,특히 국제규범화 돼가는 경쟁법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선전해 점유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해외에서의 경쟁법 위반의 덫에 걸릴 위험도 그만큼 높아진다.

따라서 차제에 소극적이고 사후적인 대처에서 벗어나 정부와 기업은 물론이고 학계와 법조계 실무 차원에서 유기적으로 나서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연합이 적용하고 있는 각종 면책제도에 대한 연구,축적된 판례에 대한 분석 등을 통해 법률위험을 최소화하고 대항논리를 개발해 적어도 우리 기업이 그들 국내 기업과 차별 받지 않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다해야 한다. 법은 아는 만큼만의 정의를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