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가난한 나라에서 민주주의 꽃을 피울 수 없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찾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유럽의 한 신문기자가 한 말이다.

전쟁의 폐허로 공장 철도 도로 등 시설물이 대부분 파괴되고 하루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인권 자유 평등 같은 '민주주의'는 아예 논할 수조차 없다는 의미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한민국을 비민주 국가라고 비아냥거리는 언론은 없다.

오히려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로 세계는 주목하고 있다.

세계적 조사기관인 미국의 프리덤하우스가 세계 각국의 정치 자유도를 조사해 발표하는 '자유도 보고서'(freedon in the world)에 의하면 한국은 조사대상 198개국 중 미국 일본 등과 함께 자유도 선진국에 포함돼 있다.

⊙ 시장이 곧 민주 장터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학자들에 의하면 경제 발전을 위해 민주주의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경제 발전에 효율적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역으로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는 경제발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장하준 교수저 사다리걷어차기)

경제발전이 민주화에 필요하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로도 입증된다.

민주 국가로 불리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도 산업화 전에는 일반 서민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경제 발전으로 중산층 시민계급이 형성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보통 비밀투표가 도입되었다.

필리핀 등 일부 저개발국가는 민주주의 제도를 운영해왔으나 아직까지 민주국가로 분류되지 않고 있다.

필리핀은 1980년대에 독재자 아키노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지만 그 후 정권의 장기집권으로 군부 쿠데타가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 학자들은 중산층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경제성장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 교육받은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어야 비로소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가난에 허덕인다면 정상적인 토론과 합의, 협상과 상호주의 문화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극빈자와 부자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마찬가지 논리에서다.

⊙ 민주주의는 공평, 시장경제는 효율?

선진국들이 채택하고 있는 경제 체제는 모두 시장경제이다.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 국가들이 이상향을 그리며 시도했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민주주의는 시장경제와 본질적으로 비슷한 요소 및 구조를 담고 있다.

모두 개인의 자유와 자기책임을 강조한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이념에 바탕을 두고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한다.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은 국민 대중, 즉 소비자들이 왕이자 시장의 주인이며, 이 주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각축하는 가운데 저절로 보이지 않은 손이 작동한다고 본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밀접한 관계는 정부 정책에서도 읽을 수 있다.

민주 국가의 정부는 복지 국가를 만드는 데 정책의 최종 목표를 둔다.

복지의 기준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규정하든 아니면 '최소 수혜자(예를 들어 서민)의 최소한 행복'으로 정하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복지국가는 전체 국민소득이 높아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도로 등 사회간접시설이나 양로원 고아원 공공도서관 등 사회 복지시설은 세금을 충분히 거둬야 건설할 수 있다.

나라가 가난하면 이러한 시설 자체가 불가능하다.

가난한 나라에서 깨끗한 강물을 볼 수 없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소득이 높아져야 강물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 예산을 편성할 수 있고, 나무를 쓰는 것보다 가스나 원자력 등 깨끗한 연로를 쓸 수 있다.

유엔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가 경제성장률에 큰 관심을 갖는 것도 결국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 시장경제는 정의(正義)로운 체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서로 상충하는 가치라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민주주의는 '1인1표'이고 시장은 '1원1표'원리가 적용되고 있으므로 시장경제는 비민주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는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는 데 반해 시장경제는 효율만 추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시장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초래되는 오해이다.

만일 시장에 1원1표 대신 1인1표가 적용된다면 어떤 현상이 빚어질까.

기술자들이 많은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개발한 초대형 고급 TV나 KTX 좌석을 1인1표 방식으로 똑같은 가격에 팔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한 달이 지나면 고급택시나 KTX는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1원1표 제도는 한정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적 정의가 작동하도록 촉진한다.

열심히 일한 자에게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는 정의로운 제도이며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계급사회의 폐해를 완화한다.

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에서 오히려 계급사회적 모순이 더욱 극성을 부렸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공산주의였던 구소련에서의 당간부 계급이나 지금 북한에서 계급 사회적 특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시장경제는 자기 수정이 가능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자칫 집단주의에 악용될 위험이 있다.

투표로 선출되는 국회의원들은 이익집단의 요구를 무시하기 힘들고 대중선동이 난무한다면 민주적 합의 과정 자체가 작동하지 않는다.

시장도 환경 오염을 일으키는 등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경우 정부가 개입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로 해마다 수백만명이 죽고 있지만 말라리아약 개발보다 살 빼는 약 개발에 더 많은 연구개발비가 투입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장경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문제점을 스스로 고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제도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자유와 경쟁이라는 공통요소를 갖고 있으며 문제점을 스스로 고쳐 나가는 자기수정이 가능한 제도이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