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19일 대기업들을 향해 "오늘 즉시 금고 문을 열어 달라"고 촉구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대기업들의 투자 확대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 긴요하다는 취지였다. 그것이 선대 경제인들이 발휘했던 모험가 정신을 구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길이라고도 했다. 박 대표가 대기업 금고 속에 잠자고 있는 것으로 지목한 돈은 100조원이다.

기자는 나라 경제의 앞날을 걱정하는 박 대표의 충정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총체적 경제 위기를 맞아 정치권과 경제계가 위기 극복을 위한 동지적 관계를 구축하는 데도 반대할 생각이 없다. 위기 때 감행하는 선도적 투자가 미래의 수익력과 시장 주도권을 강화하는 결실로 나타난 사례들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당장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집권 여당 대표의 절박한 호소만으로 기업 투자가 늘어날 것 같지 않다는 말이다. 기업들이 투자를 계획하고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다른 곳에 있다. 불확실성의 실체를 읽어 내는 전략적 감수성과 통찰력,변화의 흐름을 탈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전대미문의 경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혁신과 비즈니스 모델의 대전환도 이뤄져야 한다. 이런 내부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100조원을 풀어 버릴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돈은 아무런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표표히 흩어져 버릴 공산이 크다.

구조조정 문제도 투자 못지않은 딜레마다. 구조조정에는 필연적으로 고통과 희생이 뒤따른다. 임금이 깎이고 실업자가 양산된다.

하지만 전 세계 모든 기업들이 다시 몸을 만들고 있는데 국내 기업들만 참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세계 최강의 제조기업인 일본 도요타는 이미 6000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했고 10년치 일감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 보잉도 1만명을 줄이겠다고 나서는 판이다. 삼성 LG 현대자동차 같은 국내 대표 기업들이 대규모 감원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 게 다행스런 상황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 들어 많은 기업인들을 사면해 주고 법인세를 감면해 주며 갖가지 투자 규제까지 풀어 줬는데도 기업들이 너무 성의 표시를 안 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형태의 '거래적 리더십'으론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게 경제계의 중론이다. 사실 반기업 정서가 강했던 노무현 정부 시절,경영 여건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투자를 미루거나 줄인 기업은 별로 없다.

되풀이 강조하지만 기업들은 내부 역량과 외부 환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투자를 결정한다. 요즘 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두려움 때문이다. 시험이 어려우면 변별력이 높아지듯이 경기 침체기에는 핵심 역량이 있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간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 섣불리 나섰다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기 쉽다. 이제 막 자신의 역량을 재점검하고 있는 기업들에 '투자를 할 것이냐,말 것이냐'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는 없다.

더욱이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 끌고 들어와서는 곤란하다. 차라리 투자 여부를 빨리 결정하지 못하는 기업의 내부 역량을 비난하는 게 온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