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곤충으로 태어난다 해도 수컷으로 태어날거야."

5년 넘게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아주머니께서 갑자기 사정이 생겨 떠난 후 몇 주 동안 비상 상황을 겪으며 사무쳤던 생각이었다. 새로운 분들을 소개받았지만,인연이 닿는 분이 없었다. 아침마다 애들 등교 준비와 출근 준비는 거의 전쟁이었고,저녁엔 집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로펌 생활이란 것이 아침 일찍 나와 자정 즈음해서야 들어가기 일쑤였으니 애들 봐주는 분 없이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었다. "너는 도대체 몇 년 동안이나 애프터 서비스를 해줘야 하느냐"고 하시면서도 급한 일이 있을 땐 달려와 도와주시는 친정 어머니도 두 집 살림에 체력이 바닥나 나날이 초췌해지셨다.

첫 아이가 돌이 막 지났을 무렵 이유 없이 아픈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새로 도배하고 이사 온 직후였으니 아마도 새집증후군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입원해 검사를 하자고 했다. MRI를 찍기 위해 부형제를 놓으면서,혹시 사망해도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에 보호자 서명을 하라고 할 때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아이가 MRI 기계 속에 들어갈 때에는 아예 대성 통곡이 나왔다. 옆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의 귀엣말 소리가 들렸다. "애기가 많이 아픈가봐,딱하게….' 내가 명주실처럼 가느다란 아이의 명줄을 두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행여 그 실을 놓치게 될까봐 무서웠다. 그때도 출산 직후부터 아이를 봐주시던 아주머니가 그만두게 되셨다. 겨우 2년차 변호사였기 때문에 행여 사무실에 누가 될까봐,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 끙끙 앓았다. 석가모니가 왜 '인생은 고(苦)'라고 하면서 출가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눈앞이 깜깜해지고,헤어날 구멍이 없어 보이다가도 주변의 도움과 마음에 맞는 아주머니를 만나 상황을 수습하고 나면 첫 아이 때의 산고를 잊고 둘째를 낳듯,워킹맘의 고단함도 조금씩 잊혀지는 것 같다. 어찌어찌해 우리 큰 애도 이제 고등학생이 됐다.

혼자서 직장일 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느냐며 지레 겁 먹는 미혼 여자 후배들을 종종 만난다. 그럴 때 나는 '지리산론'을 펼친다. "대학 4학년 때 같은 과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 일이 있었어. 천왕봉 정상이 어찌나 높고 험해 보이던지,도대체 길이라곤 없어 보였지. 그런데 막상 산을 타기 시작하면 의외로 길이 나 있는 거야. 수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밟고 지나가 길도 훤했어.

같이 간 일행은 물론,산에서는 모르는 사람들도 힘이 돼. '거의 다 왔습니다,힘 내십시오'란 말 만으로도 힘이 나거든. 결혼도,아이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야."

인생길이나 산행이나 다르지 않다.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일단 시작하면 다 길이 보이게 마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