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전 11시 경기도 안양에 있는 LS타워 17층 회의실.대한사이클연맹 회장 추대위원 7명이 구자열 LS전선 회장(56)을 찾아왔다. 대한사이클연맹 회장직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딸각거리던 정용택 한국실업사이클연맹 부회장이 "한국 사이클의 수장을 맡아 달라"고 운을 뗐다.

구 회장은 어려워하는 기색없이 선선히 수락했다.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다. 혹시 구 회장이 거절하면 어쩌나 해서 노심초사하던 연맹 측 사람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정 부회장은 "사이클연맹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다"며 "사이클에서도 박태환 같은 선수가 곧 나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구 회장은 한가한 것일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경제위기 속에서 대기업 총수라는 사람이 사이클연맹 일을 한다는 게 온당한 것일까. 하지만 직원들은 뜻밖에도 구 회장의 결정을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케팅 부서의 한 과장은 "사이클연맹 회장을 맡아 당분간은 바쁘겠지만 회사일을 돌보는 데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생산라인의 한 임원도 "구 회장은 철저한 사전준비와 시나리오 작성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며 "두 마리 토끼(사이클연맹+회사 경영)를 잡을 자신이 있으니까 수락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전거로 키운 근성

구 회장에게 자전거는 단순한 운동기구가 아니다. "자전거를 타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고 인내심을 키운다"는 표현대로 인생과 경영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공간이다. 자전거에 얽힌 구 회장의 일화는 무수하게 많다. 서울고 2학년 때의 일.자전거를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났다. 머리뼈가 함몰되는 큰 사고였다. 6시간이나 수술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아버지(구평회 E1 명예회장)가 "다시는 타지 말라"며 자전거를 집어던졌지만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2002년에는 자전거로 해발 3000m가 넘는 알프스 산맥을 넘는 '트랜스 알프스' 대회에 도전했다. 7박8일 동안 650㎞를 달려야 했는데 코스에 절벽길이 많아 기권자가 속출했다. 부인 이현주씨는 "냉수를 떠놓고 무사완주를 기도하다 보니 나중엔 내 이름이 '완주'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주변의 만류가 있었지만 구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회에 참가해 한참을 달리다 보니 피부가 짓이겨지기 시작했다. 물집이 잡히고 상처에서 진물이 흘러나오자 자전거 페달에서 발을 떼고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구 회장은 독일부터 이탈리아로 이어지는 코스를 완주해 '피니셔(Finisher)'라고 쓰인 티셔츠 한 장을 얻었다. 구 회장은 "그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는 근성을 배웠다"고 회상했다.

◆크리스마스의 '전설'

구 회장은 덕장(德將)의 면모를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자상하다 못해 깜짝 놀랄 정도로 세심한 편이다. 그는 자전거로 출근한 날이면 항상 회사 헬스장에서 샤워를 하는데 직원들이 없는 시간에만 이용한다. 한번은 구 회장에게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구 회장다운 답이 돌아왔다. "샤워장에서 회장과 마주치면 직원들이 헬스장을 쓰려고 하겠어요?"

LS전선 선배들이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전해주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2004년 12월 24일.한 라디오 방송에서 "LS전선의 구자열 부회장(당시)이 직원들과 함께 듣고 싶다며 신청한 곡입니다"는 멘트와 함께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흘러나왔던 것.그 일 이후로 구 회장은 직원들 사이에서 '오빠 부대'에 맞먹는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준비경영-미래경영

구 회장은 사람은 덕(德)으로 부리고 일은 시스템으로 하기를 좋아한다. 지난해 6월의 일이다. 당시 부회장이던 그를 만났다. 점심 수저를 들다 문득 그가 "우리가 인수한 수피어리어 에식스를 아예 합병하면 어떤 장 · 단점이 있는가를 직원들에게 알아보라고 했다"고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LS가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면 어떻게 되느냐'를 알아보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정이라고 해도 업계에 충격을 던져줄 수 있는 심각한 말이었다.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느냐고 물어보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실력이 부족한 것은 인내할 수 있지만 늦어서 실패한 것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경영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해야 합니다. 사전에 대비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준비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직원들에게 심어줘야 합니다. " 필요하면 기업 국적까지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준비하는 경영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구 회장은 올 1월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승진하면서 LS전선과 LS니꼬동제련,LS엠트론을 관장하는 수장 역할을 맡았다. 최고경영자(CEO) 역할은 손종호 LS전선 대표와 심재설 LS엠트론 대표에게 넘겼다. LS그룹이 LG에서 분가하던 2003년 LS전선에 합류한 그가 5년여 만에 최고경영자의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 구 회장은 그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했다.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는 구조여야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구 회장은 대신 신사업 발굴과 M&A와 같은 굵직한 그림을 그려 나갈 예정이다. 그는 "지난해 수피어리어 에식스를 인수하는 등 외적 성장이 어느 정도 이뤄진 만큼 올해는 내실을 다지는 방향으로 경영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