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미국의 내로라하던 투자은행(IB)들은 모두 몰락했다. 월가의 상징이었던 '빅5' 가운데 리먼브러더스는 파산,메릴린치 베어스턴스는 매각으로 공중분해됐고,은행지주회사로 겨우 살아남은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도 이제 투자은행이 아니다.

지난 수십년 세계 금융시장을 지배했던 IB 모델의 붕괴다. 눈앞의 이익만 좇았던 단기투자가 빚어낸 모럴 해저드와,다단계식 파생상품을 통한 거품만들기로 돈을 벌어온 카지노식 미국 투자은행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전문가들은 또다시 IB의 진화(進化)를 말하지만,새롭게 등장할 IB가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미국 투자은행은 '투기(投機)은행'에 다름아니었다. 레버리지(leverage)란 이름으로 무한정 빚을 내 돈놀이만 일삼아 온 것이 IB의 실체였다.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경우 2007년 7000억달러의 외부자금을 끌어들였는데 정작 고객자산은 230억달러에 불과했다고 한다. 부채가 자본의 30배를 넘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우리는 2월부터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있다. 업종 간 칸막이를 없앤 '금융빅뱅'과 글로벌 IB로의 도약을 지향했고,그 비전은 한국판 골드만삭스,메릴린치였다.

지난해 금융쓰나미가 이들을 삼켜버리기 전만 해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서브프라임모기지가 이미 터졌고 형편없는 재무구조가 드러났는데도 파산 직전까지 리먼이 우리 금융산업 선진화의 모델로 손꼽혔던 것 또한 코미디같은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미국 IB의 실패가 비즈니스 모델의 본질적 결함보다는 운용방식의 문제와 위기관리 능력의 부재 탓이라고들 말해진다. 교통사고에 비유한다면,자동차의 구조결함 때문이라기보다 운전 과실,잘못된 신호체계,과속 감시를 게을리한 교통경찰의 책임이 더 크다는 주장이다.

원인이 어디에 있든 IB는 망했고 우리 금융의 이상(理想)은 무너졌다. 금융빅뱅을 앞둔 지금 모든 증권회사들은 여전히 선진형 투자은행을 말한다. 하지만 역할 모델이 사라진 지금 그것이 어떤 금융회사여야 할지는 다시 원점이다.

미국 IB는 당초 19세기 중반 기업의 유가증권 인수를 통해 자금을 공급하고,인수합병(M&A)을 주된 업무로 하는 금융회사로 출범했었다. 본질이 벤처캐피털이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180여년 동안 유지됐던 주식중개 고정수수료 제도가 1975년 폐지되고 경쟁체제로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수익 보전을 위한 증권사들의 '금융 백화점'식 영업,끝없는 파생상품 확대재생산이 IB 전성시대의 시작과 함께 몰락의 전조(前兆)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식 IB가 금융산업의 엄청난 변화와 혁신,창조의 원동력이었고,다시 거듭난 금융비즈니스의 모델이 곧 등장하게 될 것 또한 틀림없다.

규모가 작고 시장은 좁고 역량이 부족한 데다 경쟁마저 심한 우리 금융회사들이 한국형 투자은행의 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글로벌 IB를 내세우기 전에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비즈니스 모델을 지원하고,유망산업에 자본을 배분하는 투자를 통해 성장과 과실을 공유하는' 벤처캐피털의 기본으로 되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M&A든 자산관리든 상장업무(IPO)든 한두 가지 강점분야로 특화하는 '선택과 집중'도 유효한 전략일 수 있다.

무엇보다 월가 IB의 실패가 필연이었던 이유를 다시 깨우칠 필요가 있다. 리스크의 통제 범위와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금융상품의 남발이었다.

그래 놓고 고객은 알 바 아니었다. 오직 금융회사 경영진과 주주의 이익,직원의 인센티브를 위한 상품판매가 전부였을 뿐이다.

'금융서비스'기업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스스로 투기의 함정을 판 결과였던 것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