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사재기' 극성땐 환율 1300원 갈수도

은행 딜링룸 "외환위기 다시 온 것 같다"



"외환위기가 다시 온 것 같다. "

원ㆍ달러 환율이 29일 장중 한때 1200원 선마저 뚫자 외환딜러들조차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국의 '구제금융 합의'라는 대형 환율 하락 재료가 생겼는데도 환율이 거침없이 오르자 외환시장에 패닉(심리적 공황)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외국계 은행의 외환딜러는 "역외세력은 물론 국내에서도 '일단 달러를 사고 보자'는 심리가 강하다"며 "이런 분위기라면 환율이 1300원대까지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왜 오르나

환율 상승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경상수지 적자,외국인의 주식 매도 등으로 수급 균형이 무너진 데다 '외환보유액 감소 논란' 등에 따른 정부의 시장개입 한계 등으로 기회만 있으면 환율이 올랐다. 특히 지난 26일 정부의 대규모 외환스와프시장 개입 선언,28일 미국 의회의 7000억달러 구제금융안 합의 등 대형 호재에도 불구하고 29일 환율이 장중 40원가량 오르며 1200원까지 치솟은 것은 글로벌 신용경색에서 비롯된 '달러 가뭄'이 정책당국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증거로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은행들은 올해 초부터 장ㆍ단기 달러자금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지난 15일 이후에는 "오버나이트(하루짜리 달러차입)로 겨우겨우 연명한다"고 하소연해왔다. 또 이날 스와프포인트는 -3원75전에 마감,전주말(-1원50전)보다 격차가 확대됐다. 스와프포인트는 선물환율에서 현물환율을 뺀 것으로 마이너스가 커질수록 외화자금난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결과만 놓고 보면 지난 주말 정부의 외환스와프시장 개입 선언이 '언발에 오줌누기'에 그친 꼴"이라고 말했다.

임지원 JP모건체이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미국 구제금융안이 합의된 것은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는 것일 뿐 금융시장의 회복을 거론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시장 일각에선 "기업들이 '달러 사재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최근 환율 급등은 '오버슈팅(과열)'하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1200원을 넘어서면 1300원까지 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실물경제 타격 우려

환율 급등은 실물경제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당장 환헤지 상품인 키코(KIKO) 등에 가입한 기업들은 환차손이 불가피하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원ㆍ달러 환율이 1200원까지 오르면 키코 가입 중소기업의 70%가 부도 위험에 몰리게 된다"고 주장했다. 중소기업이 쓰러지면 가뜩이나 위축된 내수경기가 더욱 침체되고 소비도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물론 환율이 오르면 수출기업들은 채산성이 개선된다. 하지만 세계경기가 둔화되는 상황에서 수출이 얼마나 늘어날지는 회의적이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우리나라의 수출은 환율보다 세계 경기에 더 민감하다"며 "세계 경기가 꺾이면 환율이 올라도 수출이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환율 상승에 따른 물가 불안도 근심거리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국제유가 등 원자재값이 하락하면서 지난 7월 5.9%(전년 동월 대비)에서 8월 5.6%로 둔화됐지만 환율이 급등하면 물가 불안이 재연될 수밖에 없다.

오석태 한국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환율이 오르면 내수가 위축되고 물가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현재 상황은 해외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기 때문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반면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외환보유액은 이럴 때 쓰라고 쌓아둔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달러를 풀어 기업들의 달러 자금난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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