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화론(黃禍論)이 유럽에서 제기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다. 황색 인종이 일어나 백인들을 위협할 것이라는 주장으로 중국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에 대한 공포와 경계심의 표출이었다. 유럽이 중국에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주장한 학자도 있었다.

독일의 빌헬름2세는 이를 책략(策略)으로 삼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상으로,그는 동양인의 힘이 커지면 칭기즈칸처럼 서양인을 무자비하게 멸망시킬 것이라며 러시아의 아시아 침략을 부추겼다고 한다. 그 결과가 1904년 러일전쟁이다.

이 형편없는 인종적 편견은 시대를 넘어 확대재생산된다. 몇 년 전 출간된 스티븐 모셔의 <헤게몬(Hegemon)>이 대표적이다. 다만 인종을 거론하지 않고,직설적으로 중국을 위협의 주체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른바 '중화론(中禍論)'이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일관된 목표는 패권국가라고 단언한다.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존심이 근대에 서구열강으로부터 훼손당한 데 대한 역사적 불만,한때 절정의 세력을 구가했던 옛 소련의 팽창주의,이슬람 혁명국가의 편집증적 민족주의가 한데 뭉쳐진,자신들의 패권만이 정당하다고 믿는' 나라라는 것이다. 경제발전을 통해 시장의 힘이 커지면 중국 또한 결국 자유시장 체제의 민주국가로 바뀔 것이라는 낙관은 한마디로 '착각'이라고 규정했다.

이 또한 편견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중국이 이번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그러한 패권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나선 것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이징올림픽은 분명 중화(中華)의 부활과 도광양회(韜光養晦,참고 기다리며 힘을 기른다)의 시대에서 벗어났음을 알리고 있다. 무려 100여개국 정상들을 들러리로 세워 놓고 장이머우 감독이 특유의 물량공세와 인해전술로 펼쳐낸 개막식에서 보여준 것은 오직 한 가지 중국 내셔널리즘이자 강대한 힘이었다. 인류 문명을 바꾼 화약 종이 나침반 인쇄술 등 4대 발명품을 강조한 것도 '모든 길은 로마'가 아니라 '원래 중국으로 통했다'는 끝없는 자부심의 과시에 다름 아니다.

중국의 실체가 그러하다면,중요한 것은 중국이 추구하는 그 패권이 바로 옆의 우리나라에 어떤 의미를 갖느냐의 문제다. 사실 복잡할 게 없는 질문이다.

싫든 좋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중국에 있어 우리는 변방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2000여년 전 진(秦)제국 이래 중국의 통일왕조가 주변국과 대등하고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들 밖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강요했던 복속과 굴종,그것이 중화주의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중국의 성장과 발전이 대한민국에 가져올 당장의 득실(得失)을 따지기에 앞서 과연 앞으로 거대 중국과 협력과 공생이 가능할지 국가생존전략 차원에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중국이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자 투자대상국이므로,그들에게 한국은 꼭 필요하고 우리로서도 중국은 희망이라는 생각은 순진한 착각일 수 있다.

물론 우려와 함께 기대도 공존한다. 13억 인구의 거대 시장,넓은 국토,풍부한 자원은 기회임에 틀림없다. 동반자적 발전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기술이나 산업구조,경제적 개방성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할 때까지일 뿐이다. 그것이 한계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최근 "중국이 훌쩍 달아나 버리면 다시 기회가 없는데…한국 기업들 웬만한 것은 다 뺏기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중국을 넘어 우리가 살 길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두려운 것은 그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