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산 < 소설가/대하소설 '삼한지'작가 >

대하소설을 쓰느라 고생하던 막바지에 유독 지독하게 굴던 카드회사가 있었다.

그 A카드사는 당시 유명 대기업 계열회사였다.

역시 대기업 계열사인 또 다른 B카드사는 달랐다.

B카드는 결제일을 넘긴 내게 한도를 늘려주면서까지 연체를 막는 데 도움을 주었으나 A카드는 가뜩이나 어려움에 처한 나를 아침저녁으로 닦달하고 협박했다.

이용 가능한 모든 서비스를 막고 무조건 갚으라며 포악을 떨었다.

모 방송국과 드라마 원작계약을 체결하고 목돈을 손에 쥐던 날,나는 A카드사와 맺은 악연을 청산한 뒤 카드를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A사 제품을 단 한 번도 사지 않았다.

그 회사에서 파는 기름 한 방울 차에 넣은 적이 없다.

나는 지난달에도 A사 제품과 외국에서 만든 수입제품을 상점의 같은 진열대 위에서 만났다.

그리고 과거의 원한을 갚는 짜릿하고 통쾌한 심정으로 값이 조금 더 비싼 외제를 구입했다.

날마다 쓰는 물건인데 매일 A사 로고를 보면서 불쾌한 추억을 떠올릴 이유도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고동락(同苦同樂)한 B사에 대한 감정은 이와는 정반대다.

기름을 넣을 때는 좀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가능한 한 B주유소를 이용한다.

만일 지난달 진열대에서 B사 제품을 만났더라면 뿌듯한 애국심까지 느끼면서 당연히 국산품을 선택했을 것이다.

기업 이미지란 막대한 광고비를 써가며 허무맹랑한 수사(修辭)들만 나열한다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불황의 늪에 빠진 자국민을 돕기는커녕 뒷전에선 어려운 사람들을 상대로 악덕 사채업자나 다름없는 고리대금업을 벌이면서 순전히 말로만 사랑이 어떻고 인간을 향한 소중함이 어떻고 떠들어봐야 가소로움만 더할 뿐이다.

카드사에 고액 이자를 뜯기는 사람과 제품을 구입하는 고객이 똑같은 사람임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20여년 전,콩나물 가격이 폭등한 어느 해 부산 해운대에서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던 한 할머니는 음식값 500원을 올리는 데 석 달이나 걸렸다.

손님들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오는 사람들한테 직접 고지(告知)하다 보니 그만큼 시일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는 지금 전국적인 체인망을 가진 아주 유명한 복어집 회장님이 되셨다.

과문한 탓인지 국민의 따스한 눈길을 받지 못하고 성공한 기업이 있다는 말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일지언정 자국민의 사랑 없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예가 하나라도 있던가.

개인이든 기업이든 애정이란 어려운 시기를 함께 감내하고 헤쳐나가는 데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 중에는 꿋꿋이 함께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을 견뎌낸 국민기업도 있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오히려 재미를 보고 폭리를 취한 약삭빠른 기업들도 있다.

그들의 운명이 결국에 어떠하리라는 것쯤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새 정부 들어 세계적으로 값비싼 통신요금이 도마 위에 오르자 이동통신사들이 내놓은 망내 할인 서비스가 가족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돈 몇 푼에 전통적인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한다.

국제 원유값과 곡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폭등하는 판에 자사 제품의 판매가격을 올려 오히려 재미를 보는 기업도 있다니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현대 사회를 선도하는 주역은 누가 뭐라 해도 기업이며 기업인이다.

살인적인 불황으로 많은 국민이 실의에 빠져 있는 이때 어려운 사람들의 돈이 아니라 마음을 훔치는,그래서 영원히 우리 국민 속에 함께 살아 숨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백년기업,천년기업의 모태를 보고 싶다.

/대하소설 '삼한지'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