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와 재계의 갈등은 올해도 여전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지난해 갈등의 접점이 출자총액제한제도였다면 올해 이슈는 과징금이라는 점뿐이다.

공정위는 이번 주 전원회의를 열어 정유사들의 석유류 가격 담합 여부를 판정한다. 합성수지와 설탕류 담합 여부도 늦어도 상반기 중에는 심판정에 오를 것이라는 소식이다. 조사가 장기간 이뤄진 데다 과징금 규모가 많게는 2000억원을 넘을 수도 있다 하니 업계가 신경을 곤두세울 만도 하다.

해당 업계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과다한 과징금은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과 회사의 재무안정성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어서다. 더욱이 최근 군납유류 담합건과 관련한 배상판결의 사례에서 보듯 행정제재와는 별개로 민사소송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의 고통을 우려하고 있다.

시장에서 경쟁을 저해하는 담합행위는 제재 받아 마땅하다. 권오승 공정위원장의 말마따나 '반칙하는 기업'들을 제재하는 일이 '제대로 하는 기업'들로 하여금 아무 걱정없이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가 늘 옳았는지는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국회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공정위가 2002년부터 5년간 기업과의 과징금 관련 행정소송에서 전부패소한 사례는 20%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패소와 이의신청으로 되돌려 준 과징금도 1000억원 규모다. 부과된 전체 과징금의 15% 선이다. 책임 있는 정부 기관으로선 치욕스런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공정위의 '무리수'는 몇 가지 제도적 문제점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과거의 관행을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의 행정지도에 의한 가격이나 물량 조절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기업들이 "공정위가 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며 반발하는 이유다. 시내전화료 담합 혐의로 사상 최대 규모인 115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KT나 수시로 과징금을 얻어맞는 이동통신사 역시 따지고 보면 정보통신부가 유지해온 '비대칭 규제정책'의 피해자다. 기업도 관행에서 벗어나야 했지만 정책당국도 기업이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전향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과징금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자세는 옳지 않다.

과징금 부과가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점도 문제다. 정유사의 석유제품 가격담합 혐의는 3년8개월간의 조사에도 구체적인 물증을 잡지 못해 결국 경제분석을 통한 '추정담합'으로 결론 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정유사들은 또다시 이의신청과 행정소송에 몰두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단일사업자와 복합사업자의 과징금 한도(연매출의 10%) 산정방식의 형평성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단일 제품만을 생산하는 단일사업자는 위반 행위와 관련된 매출이 전체 매출이다. 하지만 다수의 제품을 생산하는 복합사업자에 대한 과징금 산정도 전체 매출을 기준으로 하다 보니 단일사업자에 비해 당연히 과징금 한도가 커질 수밖에 없다.

때마침 권 공정위원장이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데 위법행위를 한 사업자에 대해 반드시 과징금을 많이 부과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며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바람직한 변화가 이어질지 두고 볼 일이다.

김정호 경제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