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桂燮 < 서울대 교수·경영학 >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한 데 이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떨어지자 "우리나라에선 포퓰리즘이 설 땅이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정부 여당이 인기영합주의적인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이유에서다. 국민들을 소수의 특권층과 절대 다수의 서민으로 인위적으로 나누고 서민들의 감성과 기호에 맞는 정책을 남발해 권력을 유지하는 포퓰리즘이 먹혀들기에는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너무 높고,정치적으로 너무나 성숙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나라가 포퓰리즘의 안전지대(安全地帶)가 됐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르다.

정부 여당이 민중주의(民衆主義)적인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재미를 보지 못한 까닭은 우리 사회에서는 민중주의가 맹위를 떨칠 수 있는 세 가지 조건이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째,국민들은 이렇다 할 포퓰리스트 정책의 혜택을 맛보지 못했다.

장기 집권에 성공한 포퓰리스트 정권들은 기업을 국영화해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나눠주거나 대대적인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등, "즉시 체감(體感)할 수 있는" 선심 공세를 펼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교육,복지,부동산 분야에서 많은 포퓰리스트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들로부터 서민층이 가시적인 혜택을 본 사례는 거의 없었다.

정책들이 졸속으로 입안돼 오히려 피해를 입는 사례도 생겼다.

유권자들로서는 여당을 지지해야 할 이유를 피부로 느낄 기회가 없었다.

둘째,여당과 여당이 타깃으로 하는 유권자들 사이에 조직적인 연대의 끈이 약했다.

포퓰리즘이 번창한 나라들에서 보여지는 특징은 유권자들이 조밀하게 조직돼 있다는 것.노동단체 농민단체,그리고 정치단체들이 민중주의를 추구하는 정당과 유권자들을 거미줄처럼 엮고 포퓰리스트 정당에 대한 지지를 확보해준다.

우리의 경우, 정부 보조금으로 연명을 하는 사이비 시민단체들과 특정 정치인의 팬클럽을 제외한다면 포퓰리즘 정권의 허리 역할을 해줄 믿을 만한 조직이 없었다.

노조 가입률은 날이 갈수록 떨어졌고 전체 노동인구 중에서 농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급감하는 가운데 농민단체도 이름뿐이었다.

셋째,포퓰리스트 정치인다운 정치인이 없었다.

20세기 초반 남미에서 민중주의가 맹위를 떨친 데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처럼 서민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생 역정을 거쳤을 뿐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국민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을 지닌 정치가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미의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찾기 어려웠다.

집권 전에는 '서민 흉내'를 냈지만 집권한 뒤에는 서민을 외면했다.

특권층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일삼았다.

반미(反美)를 외치면서 자식들은 미국 유학을 보내고 평준화 교육을 옹호한다면서 자식들에겐 특수교육을 시키는 등 언행일치가 되지 않아 반감을 샀다.

그렇기에 아직 포퓰리즘의 조종(弔鐘)을 울리기는 이르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다음 대선에서도 포퓰리즘을 추구하는 정권이 들어서고 현 정권의 실책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유권자의 마음을 단숨에 돌이킬 수 있을지 모른다.

국민들에게 손에 쥐어지는 혜택을 남발해서 포퓰리스트 정책에 중독이 되게 한다면,집권한 뒤에도 서민들의 애환을 같이 하면서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등장한다면,우호적인 이익집단들의 이익을 보호해서 포퓰리스트 정당과 유권자들 간의 조직적 연대의 고리를 굳힌다면 우리나라에도 포퓰리즘이 뿌리를 내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풍부한 자연자원과 우수한 인적자원을 가진 남미경제를 황폐화시킨 바 있는 포퓰리즘이란 맹독성 병원균은 우리 경제에 치명타를 안길 기회를 노리며 움츠리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