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세영 < 서강대 국제대학원장 >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직접 들어본 사람들은 대통령의 구수한 화술에 빠져든다. 더욱이 시장경제 자유무역 등 경제용어가 섞여 나오는 걸 들으면 '아! 우리 대통령이 지난 3년 동안 경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구나'하는 안도를 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대화의 후반부다. 늘 대통령의 말꼬리가 슬며시 이상한 곳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바로 양극화 논리다. 새해 국정연설에 이어 그저께 있은 연두기자회견에서도 이 양극화의 덫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다. 없는 사람을 돕기 위해 세금을 더 걷겠다고 연초에 화두를 던졌다가 여론에 몰리니 이번에는 "국민이 싫어하는 증세를 당분간 추진하지 않겠다"고 살짝 비켜섰다. '당분간'이란 조건을 단 것이 일단 지방선거 카드로 쓰고 선거 후 다시 증세를 추진하겠다는 것인지의 진의조차 분명하지 않다. 더욱이 노변한담(路邊閑談)하듯 설익은 정책을 불쑥 내밀었다가 여론에 밀려 쉽게 물러선 것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 모양새가 좋지 않다. 새로 제시된 '증세 없는 새로운 양극화 재원마련'은 듣기에는 그럴 듯하다. 작년에 깎아 준 세금이 대략 20조원가량이니 기존의 각종 조세감면을 축소해 새로운 세원을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현행 조세감면·비과세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서민층,R&D를 위한 것이란 점을 생각할 때 결국 취약계층의 감면혜택을 줄여 없는 자를 도울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자기모순적 정책발상이다. 또한 기자회견에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강조했다. 그런데 이 신뢰는 양방향이다. 대통령이 먼저 국민 모두를 신뢰할 때 자연스레 형성된다. 지금처럼 양극화의 색안경을 쓰고 우리편과 상대편,그리고 없는 자와 있는 자로 나눌 땐 어느 반쪽은 신뢰의 장에서 소외된다. "누군가가 8·31부동산 대책을 무력화시키려 든다"고 말했는데 이는 현 집권층이 얼마나 편가르기식 사고에 빠져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여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실시한 8·31대책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동산이 들먹이는 것은 '누군가의 음모' 때문이 아니다. 사실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일등공신은 균형발전,행정수도 이전,기업도시 등으로 전국 곳곳에 온갖 개발호재를 터트리는 정부다. 그런데 이를 외면하고 부동산 투기를 세금으로만 잡겠다고 나섰으니 정부 뜻대로 될 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대연정의 성공사례로 프랑스의 동거정부가 자주 인용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사회주의자 미테랑 대통령은 1980년대 초 정권을 잡자마자 증세,기업규제 강화 등을 통해 없는 자를 위한 의욕적인 분배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집권의 중반을 넘겨도 서민경제가 좋아지기는커녕 실업률이 10%대를 넘어 도저히 재집권할 것 같지 않았다. 이에 노회한 미테랑은 우파에게 대연정을 제의하고 어리석게도 시라크가 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대연정의 결과는? 경제는 더욱 망가졌고 모든 덤터기를 시라크 총리가 흠뻑 뒤집어 썼다. 물론 미테랑은 대연정을 절묘하게 이용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결국 이 대연정에 녹아난 것은 프랑스 경제다. 너무 긴 세월을 좌파정권에 시달리다 대처리즘 아래 과감한 개혁을 한 영국경제를 따라잡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청신호는 이미 우리 주변에 다가와 있다. 작년 4·4분기에 5.2% 성장을 했다는 좋은 소식이다. 이제부터라도 경제가 제대로 성장을 해주면 기업이 투자를 늘려 일자리가 많이 만들어지고 세금이 더 걷혀 사회복지를 위한 재원이 마련된다. 그런데 새삼스레 정부가 나서 호들갑을 떨며 양극화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기존의 조세감면체계를 뒤흔들 필요가 있을까? 이는 잘못하면 모처럼 불씨가 지펴진 경제회복에 찬물을 끼얹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