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자동차노조(UAW) 위원장인 론 게텔핑거의 풍모는 멋진 콧수염만큼이나 귀족적이다. UAW가 항상 굳게 다문 입술과 굳은 표정으로 협상에 나섰던 스테판 요키치 전 위원장 대신 늘 웃는 모습의 그를 새 위원장으로 뽑자 업계는 "이제 좀 이야기가 될 것 같다"며 흡족해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2003년 GM과의 첫 협상 테이블에 나서면서 "빅3가 세계 경쟁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공장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며 조합원들의 양보를 요구했다. 사측으로선 고맙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파격은 협상장으로 이어졌다. 게텔핑거는 "이번 교섭의 최대 목표는 노사 공생"이라는 말을 수 차례 되풀이했다. 노조가 먼저 '상생'을 언급하니 사측이 당황할 정도였다고 한다. 임금인상 요구도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미국 언론들은 노조의 '개과천선'을 앞다퉈 보도했다. 그러나 회사가 간과한 것이 있다. 게텔핑거가 상생의 전제로 내건 조건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1998년 대규모 파업 직후 맺었던 단협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해무드에 취한 회사는 의료비 부담 등 핵심 이슈에 대한 노조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게텔핑거의 화해 제스처가 위선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회사의 실적 악화와 함께 신용등급이 곤두박질치자 릭 왜고너 GM 회장은 올초 UAW에 재협상을 요청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유산비용(Legacy Cost) 부담을 덜지 않고선 회사의 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GM이 지난해 퇴직자와 그 부양 가족에까지 의료비와 연금을 지급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52억달러.2000년보다 무려 33%나 급증하면서 회사 경영을 크게 압박하고 있다. 게텔핑거의 반응은 냉담했다. 단협이 2007년까지 유효한데 왜 벌써 재협상 카드를 내미느냐는 것이었다. 회사의 위기는 GM 본업의 경쟁력 약화에 따른 것일 뿐 UAW는 결코 협상에 응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2003년 협상 때의 자세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재선을 꿈꾸는 게텔핑거가 조합원 절반이 퇴직자인 빅3 노조의 이익에 반하는 협상에 결코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게 현지언론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정작 현직에 있는 노조원들의 입장은 다르다. 미국 자동차업계의 본거지에서 발간되는 디트로이트뉴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근로자들의 66.9%가 회사의 재협상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배 부른 UAW와는 달리 근로자들은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조의 끝없는 투쟁으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한 철강산업의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현장을 떠난 15만달러 고액연봉의 게텔핑거가 두 자녀와 네 명의 손자에게까지 연금과 의료비를 물려주느라 혈안이 돼 있다는 비난도 쏟아지고 있다. 파업을 볼모 삼아 전리품을 챙기는 노조와 회사가 망하든 말든 자신들의 입지 강화에만 골몰하는 노조 집행부.연례행사처럼 돼 버린 현대·기아자동차의 파업을 바라보면서 GM의 위기가 오버랩되는 것은 그들의 행태가 너무도 닮은 꼴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정호 산업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