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특검법 조건부 거부와 이에 맞선 한나라당의 강경 대응으로 정치기능이 사실상 정지됨에 따라 경제에도 동맥경화를 넘어서는 마비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2004년도 정부예산안과 세법개정안뿐만 아니라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국회 비준안 처리, 시장 개방에 대비한 농어민 지원 특별법 통과, 이라크 파병동의안 처리,국민연금법 개정 등 시급한 현안들마저 방치돼 한국의 대내외 신뢰도가 급속히 추락할 위기에 처했다. ◆ 불임(不姙)병 앓는 정치 정부와 정치권의 비생산적인 소모전은 노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자신의 측근이던 최도술 전 청와대 비서관의 거액 수뢰 사실이 드러나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대한) 재신임을 묻겠다"고 선언하면서 증폭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차제에 정치권의 불법 자금 전모를 밝힐 것을 검찰에 요구했지만 수사의 칼날이 자금 제공자인 기업쪽에 겨눠지면서 주요 경영인이 줄줄이 소환되고 기업 사무실이 잇달아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경제현장이 직격탄을 맞고 있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LG카드의 부실 위기가 터져나오고,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져들었지만 정치권의 경제 현안 챙기기는 실종 상태다. 부안의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문제를 둘러싼 정부와 지역 주민들의 극한대결, 노동계의 동투(冬鬪) 등으로 국가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데도 정치권은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 국제통상무대 '미아'될 판 한ㆍ칠레 FTA 국회 비준동의안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상정만 됐을 뿐 진척이 없는 상태다. 다음달 9일 폐회되는 정기국회에서 비준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내년 4월 총선 일정으로 인해 임시국회에서도 논의되지 않을 경우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한국 정부는 국제 신뢰도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조만간 국회에 제출할 이라크 파병동의안도 국회 논의조차 거치지 못하고 표류할 가능성도 있다. 한미 관계의 중대함을 감안하면 미국과의 약속 파기는 한반도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최근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가산금리가 들먹거리고 기업의 자금조달 금리가 오르는 등 국가신뢰도에 이미 빨간 불이 켜진 상태다. ◆ 국가리더십 붕괴도 배제못해 양도세 중과 등 부동산 대책을 포함한 세법개정안이 올해 말까지 통과되지 못하면 정부가 내년부터 시행하겠다고 공언한 정책들이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 올해 내수소비와 설비투자가 감소한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버팀목 역할을 해준 수출이 내년에도 계속 순항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증폭되면서 기업들이 지속적인 수출을 뒷받침할 연구개발 투자와 설비투자에 과감하게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