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처럼 실업, 퇴직, 정년에 관한 은어가 광범위하게 떠돌았던 적이 있을까. ‘45세 정년’을 의미하는 ‘사오정’, ‘56세까지 직장생활 하면 도둑놈’이라는 뜻의 ‘오륙도’를 넘어 최근에는 ‘35세 정년’ ‘38세 정년’이라는 의미의 ‘삼오정’, ‘38선’까지 등장했다. 평생직장은 고사하고 직장생활 10년을 채우기도 어렵게 됐다는 이야기다. 자조 섞인 은어들이 확산되는 배경에는 냉혹한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10월 중 고용동향’에 따르면 30대 실업률은 3.1%로 전달보다 0.1%포인트 오르는 등 3개월 연속 상승세다. 이는 지난해 2월 이후 1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이뿐만 아니라 올 들어 직장을 구한 사람보다 잃은 사람이 더 많다는 통계도 나왔다. 노동부가 상용근로자 5인 이상 사업체 6,700곳을 조사한 결과, 올 들어 8월까지 신규채용자수는 117만8,000명인 반면, 퇴직자수는 120만1,000명으로 퇴직자수가 신규채용자수를 2만3,000명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률이 퇴직률을 밑도는 ‘퇴직자 양산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굳이 통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직장인의 고용상태는 큰 기업, 작은 기업을 막론하고 ‘불안’ 그 자체다. KT가 전체 직원의 12.6%인 5,500명을 명예퇴직시킨 데 이어 KTF, 하나로통신도 대량 감원에 나섰다.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 홍역을 치렀던 금융계에서는 또다시 칼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10월 명퇴 신청을 받은 우리은행은 당초 예상인원 300명에 훨씬 미달하자 신청기간을 연장했다. 미국계 투자펀드 론스타가 인수한 외환은행도 감원설에 휩싸여 있다. 심각한 적자에 허덕이는 신용카드업계나 불황에 시달리는 증권업계도 고하위직을 가리지 않는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한편에서는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만큼 어려운 취직 관문이, 또 한편에서는 여차하면 짐을 싸야 하는 일상적인 구조조정이 공존하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봉급쟁이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난해 과장으로 승진한 H그룹 과장 최충현씨(37)는 “과장이 됐으니 이제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며 “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가 내 인생의 후반부인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승진이 곧 퇴직으로 연결되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불어 이는 30대 중반 이상 직장인들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차가운 현실을 탓하며 두손 놓고 ‘그날’만 기다릴 수는 없다. 후반부 인생을 준비하기 위한 교과서 중에서, 먼저 같은 길을 간 이들에게 듣는 경험담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자의든 타의든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이들에게는 어김없이 시련의 시기가 있었고, 끈기 있게 이겨낸 자만이 활기찬 새 인생을 시작했다. 퇴직 이후 재취업 또는 창업으로 멋진 새 출발을 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 속에 ‘내 후반부 인생을 여는 열쇠’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 -------------------------------------------------------------------------- 퇴직, 새로운 시작 / ① 박이동 도그앤캣 대표이사 경험 밑천 삼아 55세에 ‘새 출발’ “달랑 다섯명 데리고 분사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척 암담했죠. 25년 동안 근무하며 ‘보너스 1등’이라 불릴 정도로 회사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참 춥고 불안한 겨울이었습니다.” 4년 전인 99년 12월, C사 상무로 재직하던 박이동씨(56ㆍ현 도그앤캣 대표이사)는 자신이 맡고 있던 특수사료사업부를 따로 떼서 나가라는 회사의 명령에 밤잠을 못이뤘다. 구조조정, 명예퇴직, 분사가 한창 유행하던 때였고 회사로서도 피할 수 없는 결정이리라 머리로는 이해를 했지만 청춘을 바친 조직에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직원들끼리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박씨나 부하직원들이나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거부는 곧 퇴사로 연결되는 분위기였다. 결국 2000년 1월1일 박씨는 다섯명의 직원과 함께 애완동물 사료 유통기업 ‘제로니드림스’를 설립했다. 자본금 1억원이 조금 넘는 미니 회사지만 그간 다져온 노하우를 기반으로 남부럽지 않게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분사 전에도 연간 3,500억원의 매출을 올린 알짜 부서였기에 막강한 영업력을 기반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가면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이후 1년여 동안 그의 생활은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분사를 했다 해도 대기업 풍토 그대로였고 업무 역시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경영은 그런 대로 순탄했다. 수익도 웬만큼 나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자리를 지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정년까지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원하는 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분사 명령은 곧 박씨의 직장생활이 ‘시한부’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테스트 점포’ 만들어 시험경영 2000년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퇴직 이후 삶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러 고민 끝에 ‘내 사업’ 쪽으로 방향을 잡은 후로는 누구보다 맹렬하게 창업 공부로 파고들었다. 한 회사의 대표이긴 했지만 처음부터 자력으로 만든 회사가 아니었기에 ‘창업’은 처음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생소하고 어려웠다. “그나마 애완동물 사료 시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시장성에 대해서도 확신이 있었습니다. 관련 사업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지요. 펫 비즈니스(Pet Business)를 하기로 결정한 뒤로는 오히려 체계적으로 창업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창업 공부를 하기 위해 만난 유재수 한국창업개발연구원장에게서 “프랜차이즈야말로 지식산업사회의 꽃”이라는 말을 들은 박씨는 그때부터 프랜차이즈 본사를 창업하기로 방향을 굳혔다. 더불어 프랜차이즈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쌓기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관련 서적도 탐독하기 시작했다. 먼저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을 만나 교분을 쌓으면서 그들이 어떤 장단점을 갖고 있는지도 파악했다. 무엇보다 펫 비즈니스 시장의 현황과 전망을 가늠하는 데 시간을 투자했다. 시장을 알아 가면서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만 체계적으로 트레이닝받은 전문가나 프랜차이즈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욕심과 함께 자신감이 생겨났다. 1년 남짓 준비한 2001년 10월, 박씨는 사업성 테스트를 위해 수원에 애견전문점 ‘도그앤캣(Dog&Cat)’을 오픈했다. 관리직원 1명과 애견미용사 1명으로 시작한 이 점포는 이후 박씨에게 모진 시행착오를 겪게 했다. “건강한 강아지를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정직함’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정직만 추구하다 엄청난 손해를 입었지요. 가장 예쁠 때인 생후 40~50일의 강아지는 면역력이 가장 약하기도 해 관리 노하우가 부족하면 반품이나 환불요청이 밀려듭니다. 그때마다 소비자 과실을 묻지 않고 모두 떠안았어요. 그 때문에 순식간에 5,000만원 정도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 출신 CEO답게 시행착오의 근원을 빠른 시간 내에 파악, 크게 개선해냈다. 수의사를 영입해 애견 건강관리에 집중하고 소비자에게도 믿음을 심어준 것. 시행착오가 현재의 사업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수원점의 경영이 정상 궤도에 오르자 박씨는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드는 한편 제로니드림스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26년 직장생활을 접고 ‘초보 사장’이 된 것이다. 2002년 4월 반려동물(사람과 더불어 사는 동물) 전문 프랜차이즈 ‘주식회사 도그앤캣’이 탄생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도그앤캣은 애완견 프랜차이즈업계에서 2위의 규모를 갖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10억원 수준, 11월11일 현재 가맹점수는 23개다. 한창 펫 비즈니스가 뜨기 시작한 때를 잘 맞춘데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경험으로 든든한 내실을 확보한 덕분이다. “정도경영의 진수 보여줄 터” “초기 가맹점주 4명이 수의사들입니다. 다른 프랜차이즈를 알아 보다 저를 찾아온 사람들이죠. 테스트 점포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만든 교육자료나 본사의 가맹점 지원 의지, 가맹점주 훈련 프로그램, 그리고 저의 이력에 믿음이 간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애견 프랜차이즈보다 고객만족도가 높고 가맹점주들도 믿고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내용 면에서는 1위라고 자부합니다.” 박씨는 하루 대부분을 이동하며 보낸다. 한달에 한두 번꼴로 가맹점을 방문하고 상담희망자 만나는 일을 도맡아하고 있다. 전국의 번식장을 찾아 좋은 거래선을 트는 일도 박씨의 몫이다. 특히 가맹이 확정되면 점주와 함께 점포물색에 나선다. 10번 이상 후보점포를 둘러본 후 결정을 내릴 만큼 까다롭다. “프랜차이즈 본사와 가맹점은 공존공영하는 관계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가맹점주들이 상담을 해 올 때마다 상대방 입장이 돼 보지요. 가맹이 결정되면 ‘내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뜁니다. 좋은 점포가 나타나지 않으면 잠이 안 올 정도예요. 무리해서 창업하려는 이를 돌려보낸 경우도 많습니다. 가맹점을 늘이는 것보다 앞으로 가맹점과 프랜차이즈 본사가 어떻게 발전할지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박사장의 꿈은 원대하다. 내년에 가맹점 60개, 내후년이면 100개를 돌파하고, 100개 이상이 되면 독자 브랜드를 만들어 사료부터 용품까지 판매 유통시키는 전문기업으로 한 단계 뛰어오른다는 계획이다. 또 가맹점 200개 수준이 되면 국내 최초의 반려동물 테마파크를 만들겠다는 꿈도 갖고 있다. “큰 조직의 보호막이 걷히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절감했을 때, 그 중압감은 대단했습니다. 사업을 한창 키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다소 늦기는 해도 내 사업을 시작한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절반의 성공’에 도달한 것 같아요. 남들보다 출발을 잘했을 뿐이지요.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반드시 제대로 된 프랜차이즈 기업, 본보기가 되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겠습니다. 정도경영의 진수를 보여주겠습니다.”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서 20대의 패기가 엿보였다. 박수진 기자 sjpark@kbizwe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