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들은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시작된 이후 좌불안석이다. 특히 자금 담당자들은 정치인들로부터 받은 후원회 초청장과 헌금지출 목록을 정리하는 등 혹시라도 자신에게 튈지도 모르는 불똥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다음은 한 중견회사 자금담당 임원이 털어놓은 정치헌금 사례다. 일부 정치인은 대선이나 국회의원 선거 때는 물론이고 자신이 해외출장 갈 때도 돈을 달라고 한다. 시도때도 없이 후원회 초청장이 날아든다. 지난해 11월 한달동안에 수십 장의 초청장을 받았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지내는 정치인에게는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씩 주었다. 안면이 없는 정치인에게도 50만원씩 헌금했다. 사장은 이제 정치인이라면 명함을 건네주기가 겁난다고 한다. 안 주고 버티다가 혼난 적이 있다. 경영사정이 좋지 않아 후원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가 "내가 마음만 먹으면 회사 하나쯤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막말도 서슴지 않는 정치인이 있었다. 작년 대선 막판에는 억대의 돈을 보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경영사정과 관계없이 후환이 두려워 돈을 보냈다. 요구받은 돈보다 적게 보내면서 "우리 회사가 낼 수 있는 연간 한도를 채웠기 때문에 하는 수 없다"고 변명했다. 대선자금 문제가 터진 뒤 지난해 낸 정치헌금 목록을 정리해 보니 A4용지 두장이 가득 찼다. 적게는 50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천만원씩 정치자금을 주었으니 그 돈이 얼마나 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대선자금 사건을 정치개혁의 계기로 삼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3류 국가에 머물 것이다. 지금 기업인들 눈에 정치는 불신 그 자체다. 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