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yp9752@lycos.co.kr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소학교 4학년까지 다니고 8.15광복과 동시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은 하루하루가 고달픈 시간의 연속이었다. 매일 같이 '조센진'이란 손가락질에 주눅이 들고 또 대항을 하며,나름대로 작은 전쟁을 치르며 살았다. 하지만 일본에서 당한 따돌림이 고국에서도 계속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는 조선의 아이들이 나를 '쪽발이'라고 놀리며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닌가. 쪽발이의 땅에서는 조센진이라고,조센진의 땅에서는 쪽발이라고 왕따를 당하며 내 어린 가슴에는 조그만 멍이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따돌림보다 더욱 큰 시련은 집안의 몰락이었다. 일본에서 번창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고국에 와서 파산하고 말았고,나는 졸지에 어머니와 함께 아홉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아이들이 쪽발이라고 놀리던 학교마저 내게는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고,나는 겨우 열두살 나이에 소년 가장이 되어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섰다. 낙동강 모래사장에서 키운 참외를 사다가 시장에 내다 팔고,직접 담배를 만들어 팔았으며 엿과 찐빵도 만들어 팔았다. 그 가운데서도 집을 짓는데 쓰이는 서까래 나무를 져다가 파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도시락 두개를 준비한 후 지게 가득 나무를 진 채 30리 길을 걷는 일은 정말 피눈물 나는 일이었다. 나는 그 30리 길을 오가며 이빨을 물고 또 물었다. 쓰러질 듯 하면 '한걸음만 더…'라는 생각을 했고,다시 그 한걸음 뒤에 어깨가 내려앉는 고통을 느끼면 다시 '한걸음만 더…'라며 이를 악물었다. 이후 트럭의 조수 노릇을 하며 장사 수완을 익히고 또 직접 대량으로 물건을 떼어다 파는 동안 나는 어느새 타고난 장사꾼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집안의 몰락에 대해,그리고 열두살 어린 나이에 학교 대신 장터를 떠돌아야 했던 내 운명을 한탄한 적이 없다. 한탄할 시간에 물건 하나라도 더 팔겠다는 생각을 하였고,그러자 더 이상 한탄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스스로 일어설 수가 있었다. 지금 누군가 스스로에게 혹은 세상에게 한탄을 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시간에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고.그러면 어느덧 더 이상 한탄이나 원망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