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패션페어에 참가했을 때였어요. 만찬장에서 일본과 대만 기자 사이에 앉았지요. 일본기자는 영어와 중국어 모두 모르고 대만기자는 일어를 못했지만 우리 셋은 식사시간 내내 얘기했어요. 제가 대만기자와 영어로 말하고 일본기자에게 한자로 통역하는 식이었죠." 동아시아권에선 이처럼 한자를 알면 말을 몰라도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신문 제목이나 간판의 뜻도 웬만큼은 파악할 수 있다. 외국어뿐이랴.한자를 알면 우리말의 의미나 문맥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의사'라도 한자론 '醫師ㆍ議事ㆍ意思ㆍ義士ㆍ義死',무용은 舞踊ㆍ無用ㆍ武勇,실효는 '實效·失效',해독은 '害毒ㆍ解毒ㆍ解讀' 등 다른 뜻인 수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60년대 말부터 한자교육을 등한시한 결과 국내 성인의 문장해독력이 OECD 회원국중 최하위 수준이라고 하는가 하면, 한국갤럽에서 지난해 20세 이상 남녀에게 물었더니 '한자를 모르면 생활하는데 불편하다'는 답이 70.5%였다는 발표도 나왔다. 서울대가 내년부터 신입생들에게 '한자특별시험'을 실시하고, '대학국어' 교과서를 국ㆍ한문 혼용으로 바꾸는 등 한자교육을 강화한다고 한다. 기초한자 1천8백자라도 익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한글로만 써도 구체적 문맥 속에서는 혼선이 거의 안생긴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조금만 신경쓰면 한자 혼용이나 병용 없이도 얼마든지 분명한 글을 쓸 수 있고, 우리가 쓰는 한자는 중국의 간자(簡字)와 다르다는 얘기도 있다. 한글 전용과 국ㆍ한문 혼용은 이같이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서있는 사안이다. 정부가 최근 국무회의에서 '법률 한글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안'을 의결했으나 국회 일각에선 '일제식 용어를 우리 말로 풀어쓰는 건 몰라도 무조건 모든 법률 글자를 한글로만 쓰자는 건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며 반대하는 실정이다. 오늘날 한자 문화권의 인구는 17억명에 달한다. 일본에선 초등학교에서 교육한자 1천6자를 가르친다. 오죽하면 서울대에서 한자시험을 본다고 나섰을까 싶거니와 21세기 동아시아 허브국가로의 도약을 위해서도 한자교육은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