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연휴는 상당히 길다. 해외여행을 떠난 사람도 많다지만 대다수는 차례를 지낸 다음 가정에서 모처럼 여유있고 한가한 날을 보낼 것이다. 그래서인가. 연휴중 방송되는 TV영화에 괜찮은 것들이 많다. '반지의 제왕'은 모험 의리 정의의 본질,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질서유지라는 이름 아래 생겨나는 통제사회의 그늘, '엑스맨'은 언제든 가능한 돌연변이 등장에 따른 문제를 다룬다. '슈렉'(KBS2 11일 낮1시25분)도 놓치기 아까운 것중 하나다. 디즈니의 아성에 도전한 드림워크에서 만든 슈렉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으로 50여년만에 칸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초청된 작품. 눈동자와 근육의 움직임, 감정의 기복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낸 컴퓨터그래픽 기술 덕에 최근 휴렛팩커드 광고에 등장, 더욱 화제가 됐다. 사람들을 피해 혼자 살던 초록색 괴물 슈렉이 무서운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해 행복하게 산다는 줄거리는 여느 서양동화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전개방식과 결말은 전혀 딴판이다. 화가 황주리는 '우울한 날 보면 좋은 영화'라고 했거니와 상상력은 기발하고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뒤엎는 구성과 대사는 유쾌하다. 슈렉이 공주를 구하러 가는 건 갑자기 쳐들어온 이방인들을 쫓고 평온한 삶을 되찾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다. 공주 또한 매트릭스 발차기로 산적을 물리치고 개구리와 뱀으로 풍선을 만드는 등 연약하고 의존적인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 진실한 사랑의 키스를 주고 받은 뒤에도 괴물은 왕자가 되지 않고, 공주 역시 밤에는 뚱녀가 되는 마법에서 깨어나 미녀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영영 뚱녀가 되고 만다. 하지만 영화는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빚는 차별과 편견의 무서움은 물론 그것을 해소하는 건 마법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임을 보여준다. 중요한 건 외모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도 왕이 되고자 공주를 차지하려는 영주 파콰드를 땅딸막하고 그래서 못난 존재로 그린 대목 등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백마탄 왕자가 모든 걸 해결할 거라는 잘못된 환상을 벗겨내고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