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혈육과 일가친척들이 가장 돈독한 집결성을 보이는 명절이 바로 한가윗날이다. 설 명절이 있기도 하지만, 가족끼리 모여서 벌이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풍요로움으로 가슴을 들뜨게 만드는 명절로서는 한가위를 따르지 못한다. 1년 내내 고향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도 이 날만은 반드시 고향에 가보고 싶다는 이끌림에 자유로울 수 없다. 더불어 여문 곡식을 거둬들이는 계절과 맞물려 있어 그 풍요함이 가족들끼리 은밀하게 겪고 있던 갈등이나 반목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혀 준다는 기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뿔뿔이 흩어져 살던 혈육들이 저마다 기대를 갖고 막상 고향집으로 한 데 모이고 나면, 접어두려 했던 마음 한구석 어디서부턴가 찜찜하고 선뜻 어울리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만다. 이른바 누구는 잘 살고 있지만, 누구는 군색하게 살고 있다는 징표가 한가윗날의 가족 모임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와 상대적으로 못 가진 것에 대한 면구스런 심성들이 서로 상충되면서 가족들끼리 곱지 않은 시선이 오가고 급기야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말다툼이 벌어지면서 새로운 반목의 씨를 만든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생겨난 적대심과 모멸감, 그리고 감정적 앙금들이 해를 묵혀 그 이듬해의 한가윗날까지 그대로 이어져 가슴속에 남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무능력하고 변통성 없는 약자의 입장에 있는 것 같은 형제는 스스로 못난이처럼 생각되면서 막연하게 서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비교는 참으로 딱하고 유치한 것이지만, 수염이 길도록 나이를 먹어도 버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처럼의 귀향 길을 가슴 치며 후회하기도 한다. 사회 조직의 최소단위라 할 수 있는 가족끼리도 돈 때문에 생겨난 반목으로 서로 헐뜯고 삿대질이 오가는 것이 예사스런 일로 돼버렸다. 물질적인 수확을 거둔 것을 부끄러워할 까닭이 없다면,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을 모조리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기준을 반드시 외양에 드러난 가치로만 따지려들기 때문에 남이 아닌 내 자신을 스스로 괴롭히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남루하고 궁핍하게 살아도 거짓말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살아왔다면, 얼마든지 자긍심을 가질 만하고 남을 헐뜯거나 빈정거리지 않고 살아왔다면, 그 또한 올곧은 삶이었기에 응당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물질적인 수확과 풍요도 많은 것을 해결해 주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자랑스러운 것은 나름대로 명확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제 나름의 가치관을 찾아내거나 갖기가 어려운 사회를 살고 있다. 이런 혼란은 우리들이 소중하게 보듬어 안고 가려 하는 것, 즉 정치 사회적으로 스스럼없이 통용돼야 할 원칙이 수시로 흔들리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국민들의 사표가 돼야 할 정치사회나 경제사회가 욕설이고 반목이며 멱살잡이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한가윗날에 고향집에 모인 일가친척들에게 술안주 감이나 농담거리를 제공해 줄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가 나갈 올곧은 방향을 제시할 수는 없다. 연약한 여인이 결혼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현금차량을 습격하는 끔찍한 강도로 돌변해야 하는 뉴스를 접하면서 어째서 그 범법자에 대한 참담함이나 연민보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사회가 벌이고 있는 소란스러움과 주먹질이 먼저 떠오르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한가위가 다가오면 언제나 같은 꿈을 꾼다. 고향집이 있는 마을 들머리로 들어서면 수 백년을 두고 무성하게 자란 느티나무 아래 흰옷 입은 마을의 어른들이 앉아 쉬다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젊은 타향살이들을 맞이하여 부모들보다 먼저 절 받기를 즐겼던 그런 모습의 고향을 꿈꾼다. 햇살 쏟아지는 마당 한 귀퉁이에 앉아 완두콩을 털던 늙으신 어머니가 손주를 가진 며느리의 절을 받으려고 허리에 손을 얹으며 간신히 툇마루로 오르는 꿈을 꾼다. 이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가려내기 그만두고, 악착같은 편가르기 그만두고, 돈 돈 하지 말고, 좀 평화롭게 서로 웃으면서 청결한 사회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