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이라면 황소도 잡아 먹는다'고 했던가. 카드론을 마구 일으켜 가계파탄에 직면한 신용불량자들도 그렇지만,국민연금제도 개선안이란 걸 내놓은 정부꼴도 꼭 그런 느낌이다. 갚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우선 황소부터 잡아먹은 것과 과연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내기는 더 내고 타가기는 적게 타가라는 것이 어째서 '개선'인지도 의문이지만,같은 꼴을 또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볼 점이 적지않다. '국민복지연금'이란 이름으로 외상 황소를 잡아먹으려는 구상이 처음 나온 것은 70년대 초다. 포장은 그럴 듯했지만,내용은 강제저축제도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국회에서 법까지 통과시켰지만 결국 시행되지 못한 것은 그때 경제수준에 아직 때이른 감이 있었고, 강제저축에 대한 거부반응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후에도 우여곡절이 적지않았지만,어쨌든 국민연금제도는 88년부터 시행됐다. 이 제도를 이미 시행하고 있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내는 것은 적고 타가는 것은 많은 너무나 근사한 구조라 당초부터 의구심은 없지않았다. 그러나 정부도 믿는 구석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것 같다. 연금 설계당시만 해도 해마다 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였고 그런 인구구조가 상당기간 지속할 것으로 봤기 때문에 연금지급에 적신호가 켜질 날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제 국민연금 문제는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사용자측과 노동조합쪽이 보기 드물게 개편반대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그렇게 한다고 풀릴 일이 아니다. 현행 국민연금제도의 지급구조를 그대로 둘 경우 2050년에는 소득의 30%를 보험료로 징수해야 할 것이라는 계산이고 보면 제도개편은 불가피하다. 따져봐야 할 핵심은 역시 국민부담이다. 작년 기준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22.7%,국민연금 의료보험 등 사회보장성 부담을 합친 국민부담률은 28%다. 그 부담이 과하냐 적정하냐는 판단은 시각의 문제다. 철저한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스웨덴처럼 국민부담률 50%선도 논리상 선택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이나 국민부담률이 이미 일본(2001년 기준 조세부담률 17%)보다 높고 미국에 비해서도 낮지않은 선이란 점을 감안하면 더이상 급격히 부담을 늘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보는 것이 옳다. 조세저항을 표면화시키지 않으려면, 또 기업의 활력을 북돋아 경제성장을 지속하려면 그렇다. 복지부가 발표한 국민연금개편안만 해도 과연 '적정부담'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없는지 의문이다. 보험료율을 현재의 9%에서 점진적으로 15.9%로 올리겠다는 것인데 현재의 법정퇴직금(8.3%)에 거의 맞먹는 국민연금 부담을 기업들이 감내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DJ정부 아래서 국민부담률은 5%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기초생활보장제를 도입하고 각종 사회복지제도를 확충한 때문이다. 그것이 잘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역시 시각에 따라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는 국민 모두가 사회보장제도를 국민부담이라는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조감하고 선택해야할 때가 됐다는 점이다. 복지에 엄청난 부담이 따른다는 점을 간과한 채 시혜성 정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명한 주권자라면 더이상 되풀이해 좋을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국민연금제도 개편은 조세제도는 물론 각종 행정제도와 함께 종합적으로 검토돼야할 필요가 있다. 각종 행정기구 신설이나 확대도 그 긍정적 효과에 못지않게 국민부담이라는 시각을 갖고 바라봐야 한다. '작은 정부'가 최근 몇년 새 구호에서도 사라진 점은 결코 반가운 일일 수 없다. 조세부담률이 해마다 높아진다는 것은 세수증가가 경상성장률을 웃돈다는 뜻이고,나쁘게 말하면 정부가 민간 만큼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국민연금개편 논의와 때맞추어 생각해봐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다.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