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9월 윤리규범을 만든 구 사장은 그 해 12월 윤리경영을 경영이념으로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사내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른바 유통업계 종사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만성적인 악습 때문이었다. 지금은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일이지만 당시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샘플 제품이 문제였다. 새로 매장을 내거나 신제품을 출시할 때 협력회사들이 샘플을 보내 오는데 이들은 사실상 회사 구매자(바이어)의 몫이었다. 샘플중 고급 의류 같은 경우는 가격이 1백만원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뿐 아니었다. 협력회사들은 명절 때마다 구매담당자 집으로 선물을 보냈고,매장 개편을 앞두고는 선물이 아니라 수십만∼수백만원의 뇌물을 '유력자'에게 보내곤 했다. 유력자는 구매담당자만이 아니었다. 차장 부장 임원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 정도는 더 심각했다. 특히 층을 총괄하는 플로어 매니저(FM)는 매장의 입·퇴점은 물론 위치까지 실질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 회사내에서는 '알짜보직'으로 통했다. "FM으로 1,2년 근무하면 집 한채를 살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지요.자식들 결혼 축의금을 받아 수억원대로 재산을 불린 임원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사실이라고 보아야죠"(신세계 K모 부장) 이런 관행들 속에서 구 사장이 주창한 윤리경영이 임직원들에겐 실천하기 어려운 '구호'로 다가왔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직원들 사이에선 도대체 윤리경영이 뭔데'라는 의구심도 있었다. 일부에선 구조조정을 위해 비리를 파헤치려는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99년9월 제정된 '신세계 윤리규범'과 '윤리실천 지침'을 보면 임직원들이 느꼈을 충격의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총 6장 36조로 이뤄진 윤리규범의 3장은 협력회사와 공존공영하기 위해 임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규정하고 있다. '차 한잔,점심 한끼를 협력회사와 같이 하더라도 반드시 자기 몫은 자기가 계산하도록 한다''명절이나 기념일 출장 등 어떠한 명목으로도 금액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선물이나 금품을 주거나 받지 않는다.' 실천지침 3장 수수행위 금지 항목엔 심지어 이런 내용도 있다. '가족 친인척 지인이 받은 것도 수수이기 때문에 3일 이내에 직속 임원에게 보고해야 한다.보고받은 임원은 협력회사에 물건을 돌려주고 회사명의로 반송공문도 보내 윤리경영 취지를 설명한다' "당시엔 좀 황당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어요.과연 이런 것들이 지켜질 수 있을까라는 의심도 많았죠."(L과장) 영업부서에서 반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선물을 많이 팔아야 하는 회사에서 선물을 금지하면 어떻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느냐는 볼멘소리에서부터 그런 식으로 영업하면 결국 회사에 이로울 게 없다는 말도 나왔다. "어떤 임원은 윤리경영을 잘못 이해한 나머지 받기만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협력회사에 선물을 먼저 돌리기도 했어요.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지요." 구 사장은 임직원들을 교육을 통해 설득해 나갔다. 윤리경영을 선언한 지 6개월쯤 지난 2000년 중반이 되자 커피나 저녁을 얻어 먹지 않는 직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윤리경영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도 구 사장의 마음속에 점점 커져갔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