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구심점을 잃은 현대그룹은 당분간 경영권 공백상태에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정 회장이 계열사 사장단과 임원 인사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했던 점을 감안하면 특히 그렇다. 주요 계열사들은 기존 전문경영인 중심의 독립경영을 펼치겠지만 새로운 '지배구조'가 어떤 형태로 정착될지는 한마디로 오리무중이다. 현대그룹의 경영권은 일단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상선에 대한 정 회장 지분(4.9%)이 어디로 이동하느냐에 따라 향배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 개인 지분은 누구에게 현대상선에 대한 현대그룹 내부지분은 1대 주주인 현대엘리베이터(15.2%)와 정 회장 지분을 포함해 20%선에 불과하다. 2대 주주인 현대건설(8.6%)은 계열분리된 상태로 현대그룹의 지배권에서 벗어나 있다. 만약 정 회장 지분이 가족이나 계열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면 현대엘리베이터 홀로 경영권을 방어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현재 정 회장의 현대상선 지분은 수백억원의 개인 대출을 해준 생명보험사에 담보로 제공된 것으로 알려졌다. 상속인이 정 회장의 개인 부채를 갚으면 이 지분을 찾아올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채권 금융회사가 담보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그룹 일각에서는 현대상선이 적대적 인수ㆍ합병(M&A)에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현대 관계자는 "현대상선이 우량회사로 거듭나고 있지만 시가총액은 3천억원 안팎을 맴돌고 있다"며 "현대상선의 지배권을 틀어쥐면 엘리베이터 택배 증권 등을 통째로 가질 수 있어 '기업사냥꾼'들이 표적으로 삼을 만하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 회장의 장인인 현영원씨가 현대상선의 고문을 맡고 있고 지난 2001년 사위(정 회장)의 그룹 지배력 유지를 위해 장모인 김문희씨가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8.57%를 매입했던 정황을 감안하면 정 회장의 지분이 채권단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특히 정 회장이 '대북사업 지속'을 강력하게 주문했던 만큼 가족이나 관계사들이 그룹의 주력회사를 '주인 없는' 상태로 방치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가가 예전처럼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할지는 다소 미지수다. 정 회장만 하더라도 고 정주영 명예회장 아래서 오랫동안 경영수업을 받아오면서 어느 정도 시장의 '검증'을 거쳤지만 남은 가족들 중에는 그만한 인물이 없다. 그나마 현대상선이 분식회계 관련 조사를 받고 있어 회사경영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군소그룹으로 전락하나 한때 8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국내 최대 재벌로 군림했던 현대그룹은 2000년 세칭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계열사들이 잇달아 떨어져 나갔다. 남아 있는 계열사들은 아산 상선 엘리베이터 증권 등 12개사가 고작. 그나마 상선 엘리베이터 택배 정도를 제외하고는 순차적으로 그룹에서 떨어져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종합상사가 최근 은행관리에 들어가면서 현대 관계사들의 지분이 전액 감자(자본금 감축)됐고 현대증권은 현대투신이 푸르덴셜에 매각될 경우 정부가 매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또 대북사업의 주체인 현대아산은 심각한 자금난에 봉착해있어 특단의 수혈조치가 없는 이상 독자생존이 어려운 상황이다. 계열사들이 현대아산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할 것이라는 관측도 없지 않지만 현대상선이 이미 '대북사업 불가'를 여러차례 천명한 상태여서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