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년 조선 태종 15년에 출생해 1487년 성종 18년에 사망했으니 70여년을 살았다. 자를 자준(子濬)이라 하고 호를 구정(鷗亭)이라 했으며,문신으로서 나중에 그 시호를 충성공(忠成公)이라 했다. 본관은 청주,성종비 공혜왕후의 아버지. 이 정도면 이 것이 누구의 이력인지 알 만하다. 좀더 설명해 보자. 수양대군에 협력해 좌익공신 1등이 됐으며,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에 적극 가담했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이 됐으며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반역혐의로 체포됐다가 석방,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익대공신 1등이 됐다. 사후 연산군대에 이르러 윤비의 사사 사건에 관련됐다 하여 부관참시됐는데,후에 복권됐다. 그는 누구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세조가 '나의 장자방'이라 호명하던 한명회(韓明澮)이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한명회는 역사에 그 이름이 교활한 간신의 표본인 양 전시되고 있었다. '세(勢)는 시(時)에 따라 변하고,속(俗)은 세에 따라 바뀐다'는 옛말이 있거니와,지금에 와서 한명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현저히 달라졌다. 그에 대한 재평가의 기치를 처음으로 거양한 이는 드라마 작가 신봉승씨다. 이 분이 저간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데,'조선왕조 5백년'이란 대하사극을 통해 그를 난세의 경륜가로 새롭게 형상화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종과 세조,정인지와 신숙주 등도 당대적 현실을 배경으로 납득할 수 있는 현실주의 정치가로 그려냈다. 이는 마치 현대 물질문명의 사회에 있어서 흥부만 착하고 놀부만 나쁘다고 할 수 없다는 발상의 전환과 같이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한 관점의 변화에 해당한다. 그 한명회가,천하가 자기 손 안에 있다고 생각할 만큼 제세의 안목과 기량이 남달랐던 한명회가,이윽고 와병 중에 운명을 맞게 됐다. 명철한 임금 성종은 그 자리로 사람을 보내,그의 마지막 충고를 수거해 오도록 했다. 한명회는 그 엄중한 순간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삼가고 조심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십시오." 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한 평가는 역사를 재는 잣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이 최후 진술은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에도 침식되지 아니하는 명언으로서,미상불 한명회가 남길 만한 몸가짐과 마음가짐의 경계라 할 터이다. 근자에 경기도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자매결연을 맺고 '황순원문학촌-소나기마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이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일제 말기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순수문학을 지킨 거목이요 작가의 인품이 작품 속에 투영된 작가정신의 사표(師表) 황순원 선생이 필자의 은사(恩師)인 까닭으로,이 일의 실무책임을 맡고 있다. 맑고 아름다운 서정과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감정의 교류를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놓은 '소나기'는,그 작품으로서의 특성과 독자들의 사랑이 깊은 사정을 감안해 문단 일각에서 '국민단편'이라고까지 부르고 있다. 앞으로 조성될 '소나기마을'은,소설 속의 풍경,이를테면 소년과 소녀가 만나던 개울과 원두막,갈밭이 펼쳐진 산자락 등을 재현해 그 마을을 한바퀴 돌아나오면 마치 소설 속을 산책하고 나온 느낌이 드는 테마파크로 꾸며질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그 마을에 연이어 작가 황순원의 일생을 보여주는 전시관과 작품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는 상영관,세미나실,야외공연장,작가나 시인이 머물며 창작 집필을 할 수 있는 작가실 등이 건립될 계획으로 있다. 이 일과 관련해 필자에게 절실한 감회 하나는,우리 문학에 의미 깊고 독특하고 돌올(突兀)한 봉우리를 이룩한 그 분의 삶과 문학이,문학에 대한 처음의 그 순수한 열정을 끝까지 변절함 없이 지킨 결과였다는 사실이었다. 이 범박하면서도 소중한 초발심(初發心)의 교훈은,세상의 저잣거리에서 이모양 저모양으로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요긴한 덕목이 아니겠는가. 아서라! 우리 모두 정녕 삼가고 조심하기를 처음과 같이 할 일이다. kar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