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계경제포럼,일명 다보스포럼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다보스포럼은 세계 각국의 저명한 정치지도자 경영자 학자 언론인 등이 모여 현안을 심도있게 논의하는 장이다. 여기서 논의된 내용들은 세계 경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해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모임의 진행 방식은 다양하다. 청중들이 전문가들의 토론을 듣는 경우도 있지만,식사하면서 테이블별로 주제를 논의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참여한 모임 중에는 IT산업 불황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저녁모임이었는데,주제가 주제인 만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임원을 비롯 각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대거 참석했다. 테이블별 논의가 끝난 후에는 테이블마다 한 사람씩 앞에 나와서 발표하고,토의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놀라웠던 것은,절반에 가까운 테이블에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 점이다. 한국의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1위인데,2위와 격차도 크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으며,IT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한국의 사례를 잘 연구하여 적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가슴이 뿌듯했다. 세계 각국에서 영향력있는 인사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인 줄 몰랐고,우리나라도 이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왔다는 자부심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차분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인터넷 강국인가.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외에 앞서는 것이 있는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초고속 인터넷의 인프라를 구성하는 장비들은 대부분 외국산이며,국내 기술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속도가 빨라지고 용량이 커질수록 이런 경향은 더 심하다. 장비뿐만이 아니다. 핵심이랄 수 있는 소프트웨어도 거의 대부분이 외국산이다. 심하게 표현하면 우리는 인터넷망을 설치하고 운영하고 있을 뿐,외국회사들에 돈 벌어주는 거대한 시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인프라 외에 콘텐츠분야도 경쟁력이 떨어진다. 필자는 유학시절 미국의 콘텐츠 경쟁력을 실감한 적이 있다. 이사를 마친 후 우연히 서점에 들렀는데,한 코너에 그 도시에 정착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 빼곡히 차있었다. 집을 구하는 방법,주요 관공서 위치,각종 물품을 싸게 사는 방법 등 처음 그 도시에 정착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각종 정보들이 책으로 정리돼 있었다. 다른 도시에 가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밖에도 다양한 지역정보들이 책으로 나와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오프라인 콘텐츠들이 90년대 중반부터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인터넷 콘텐츠로 변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필자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인터넷 콘텐츠는 인터넷이 생긴 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그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오프라인 콘텐츠가 커다란 경쟁력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록문화가 미흡하고 오프라인 콘텐츠가 부족한 우리의 실정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의 사용 행태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인터넷 사용시간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내용 면에서는 새로운 부가가치를 생성하기보다 소비적 측면이 주류를 차지한다. 즉,게임 채팅 음란물 동영상교환 등 소비하고 즐기는 일이 인터넷 사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필자는 소비문화가 나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창조적인 측면과 소비적인 측면이 균형있게 자리잡아야 하는데,한쪽으로 편중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세계 1위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지만,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콘텐츠 사용행태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다. 따라서 우리는 샴페인을 터뜨리거나 자만할 때가 아니다. 아직도 모자라는 점이 많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문제의식을 갖고 우리의 가장 큰 장점인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인 것이다. 이렇게 전 국민적인 공감대를 갖고 열심히 노력할 때,진정한 인터넷강국은 보다 가까워질 것이다. cahn@ahnla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