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경제를 성장시키는 엔진입니다. 당장 돈 안되는 기초과학연구는 기업이 아니라 대학 몫이지요. 그런 연구비는 정부가 기금을 마련해 전적으로 지원해야하구요. 물론 대학도 스스로 자립기반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역사회도 살리고 나라 경제도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지요." 리처드 레빈 미국 예일대학교 총장(56)은 학자풍의 외모와 달리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거리낌없이 "돈" 얘기를 꺼내는 것도 예사롭지 않지만 그가 총장 재임 기간 동안 올린 "실적"을 자랑하는 모습은 더욱 그렇다. 그가 지난 10년간 모금한 기금은 모두 17억달러.우리 돈으로 2조2천억원이나 된다. 15~16일 고려대 아시아기업지배구조연구소가 주최한 제3회 "아시아 기업지배구조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예일대 기업지배구조 국제연구소를 이끌고 방한한 레빈 총장을 만났다. -예일대에 쌓인 기금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재임기간에 17억달러를 모금해 현재 26억달러 정도다. 캠퍼스 재단장 및 건축 사업을 위해 30억달러 달성을 목표로 지금도 기금 모금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의학 및 과학 분야에 10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인데다 지역사회(뉴헤이븐) 발전을 위해서도 써야 할 돈이 많다." -뉴헤이븐시를 어떻게 돕고 있나. "총장 취임 직후 예일대가 뉴헤이븐에서 최대 고용주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인데도 지역사회 복지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제조업 도시 뉴헤이븐은 공장들이 남부나 해안지역으로 옮겨간 뒤 유령도시처럼 변해 있었다. 지역경제 부흥도 대학의 책임 아닌가. 지난 93년에 1억달러를 기부했고 그 동안 예일대에서 분사(spin-off)하는 회사들을 통해 15억달러를 유치했다." -대학에서 분사한 회사라는 게 뭔가. "연구 성과물을 사업화하는 회사를 뜻한다. 대학에서 개발한 기술을 민간에 이전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들 회사를 위해 예일은 제약회사 화이자의 연구개발(R&D) 부사장을 고용해 분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과학자를 발굴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허업무와 각종 컨설팅 서비스도 제공했다. 동문이 운영하고 있는 벤처캐피털과 연결했고 주정부와 협의해 대학 소유 부동산을 직접 제공하기도 했다. 10년 사이 예일에서 떨어져 나간 분사 회사가 27개나 된다. 대부분 생명공학 관련 회사들이다." -27개 분사 회사의 직원은 몇명이나 되나. 예일에서 경영진도 파견하는지. "모두 1천3백명에 달한다. 적은 곳은 50여명이지만 4백명짜리 회사도 있다. 경영진을 파견하는 일은 없다. 교수들이 사장인 경우가 많다. 기업활동에 전념하기를 원할 경우 교수직을 포기해야 한다. 다만 겸임교수로서 1,2년에 한두 번이지만 강의를 계속할 수 있다. 교수로 남을 경우에는 경영활동은 1주일에 하루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 -교수들은 사업과 학문 가운데 어느 쪽을 주로 택하는지. "대개 교수직을 원하지만 점점 바뀌는 추세다. 대학원생이나 젊은 교수들은 기업활동을 목표로 연구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이공계 살리기' 캠페인을 벌여야 할 정도로 한국에서는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예일에서 특정 전공 기피 현상은 없나. "인문학 박사과정 학생이 질적,양적으로 하향 추세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학부의 철학 역사학 법학 등에는 여전히 최우수 학생들이 응시한다. 학부 때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한 우수한 인재가 대학원에서는 다른 쪽으로 선회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기피 현상을 막을 수 없다는 얘긴가. "결국 선택의 폭을 넓혀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미국의 고등교육은 차별화가 특징이다. 2년제 지역 대학,4년제 주립대 및 사립대,특수목적대(연구개발 전문대 등) 등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자신의 수준과 관심에 맞는 대학을 골라 진학할 수 있다. 성적이 나쁘면 일단 2년제에 입학했다가 나중에 4년제로 편입하면 된다." -차별화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대학은 사회적 이동성을 높여 주는 매개체(Agent of social mobility)다. 솔직히 말하면 최저소득층 출신도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이 가능한 것 아니냐.프로 스포츠를 제외하고는 학벌이 곧 신분 상승의 도구인 게 현실이다." -총장으로서 10년 후 포부는. "글로벌 대학이 우리의 비전이다. 예일대가 글로벌 지도자를 교육하고 배양하는 역할을 계속 유지하면서 국제학생을 늘릴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미국에서만이 아닌 글로벌 영향력을 키우도록 하겠다. 과학부문도 인문대와 법대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다." -계속 총장직에 남아 있겠다는 얘기같다. "10년 전 선임될 때도 젊은 편이었다. 예일은 전통적으로 젊은 총장을 뽑아 소신을 갖고 오래 일하게 해왔다. 실제로 3백년 역사 동안 임시 총장 2명을 빼면 진짜 총장은 20명밖에 안나왔다. 평균 임기가 15년인 셈이다. 물론 그만두는 것은 이사회가 결정할 문제지만 평생토록 할 생각은 전혀 없다. 1주일에 1백시간 일하고 있는데 피곤할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레빈 총장은 15일 열린 기업지배구조 세미나에서 "기업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기업에 부담이 될 수도 있으나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요지의 개회사를 했다. 그는 "가족기업이라면 투명성을 문제삼을 필요가 없을지 모르나 남의 돈을 빌려 쓰는 순간부터는 투명성이 기업의 사명이 된다"고 강조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20대에 꿈꾸던 일이냐"는 질문에 "경제학이냐 역사학이냐를 고민하다가 세상과 보다 적극적으로 만나기 위해 경제학을 택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총장을 목표로 일한 적은 없으나 총장이 되고나서보니 세상에 영향을 미칠 기회가 더 많아졌다"고 말하고 "지금 그만둬도 대만족"이라며 웃었다. 권영설 경영전문기자·김홍열 기자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