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날씨는 4월 중순까지 몹시 건조하고 간혹 대륙성 고기압이 통과하면 눈이나 우박이 내리는 등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청명과 입하 사이에 있는 곡우(穀雨.4월20일)를 전후로 봄비가 내리면 심술맞던 꽃샘추위도 마침내 사그라들고 천지에 밝고 따뜻한 봄기운이 완연해진다. 겨우내 황량하게 버려져 있던 논엔 햇빛에 반짝이는 못물이 채워지기 시작하고, 나무엔 수액(樹液)이 오를 대로 오른다. 위장병 치료와 남자에게 좋다는 고로쇠물은 경칩 이후부터 나지만 이뇨작용을 하고 여자에게 더 좋다는 거자수는 곡우 때 절정에 이른다. 지리산 남악사에선 예로부터 곡우에 조정 제관이 산신에게 거자수와 함께 국태민안을 비는 약수제를 올렸고 요즘도 이를 이어받아 남악제를 지낸다. 곡우 전에 따는 차를 곡우전차(穀雨前茶) 혹은 우전차라고 해서 특상품으로 치는 건 곡우가 지나면 새순이 잎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곡우가 되면 땅 위에서뿐만 아니라 물 속에서도 활력이 넘친다. 낚시터마다 붕어의 입질이 힘차지고 임진강 상류엔 산란기를 맞은 누치떼가 거슬러 올라온다. 또 바다에선 흑산도 근처에서 겨울을 보낸 참조기가 북상, 충남 태안반도 앞 격렬비열도 근처에 몰려든다. 이때 잡아 말린 것을 '곡우살이' 혹은 '앵월(음력 3월) 굴비'라고 부르며 귀히 여긴다. 조개와 도미와 복어 등도 곡우 무렵 것이 가장 맛있어 어채(魚菜) 어만두(魚鰻頭) 요리에 쓴다. 곡우는 이처럼 긴 겨울 어둡고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따스한 햇살 속 천지 만물이 살아 움직이는 시기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는 말이 있지만 올해엔 다행히 곡우를 앞두고 온땅 가득 봄비가 내렸다. 이번 곡우는 부활절 지구의날 장애인의날과 겹쳤다. 백곡(百穀)이 풍성해지는 건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한 넉넉하고 따스한 마음이 넘쳤으면 싶다. 그래서 이라크전쟁과 북핵문제 등으로 유독 어수선하고 심란하게 시작된 올봄, 이제부터라도 혼란스럽고 불안하던 터널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고 웃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대할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