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에 납품하자 대우가 달라지더군요.'지엠인터내셔날 제품은 무조건 OK'라는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거죠." 그 때를 회상하며 웃음 짓는 윤 사장은 앞선 기술력과 디자인이 무엇보다 시장에서 큰 '무기'였다고 말한다. "당시 적은 물량이라고 대충 만들어 납품했더라면 지금의 지엠은 없었을 것"이라는 그는 적은 물량이라도 최선을 다해 만드는 장인정신이 지엠의 또 다른 성공요인이라고 강조했다. 제일모직 납품이 자리잡으면서 반도패션(현 LG패션) 케임브리지 등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국내 판매가 활기를 띠자 일본 수출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홀치기 넥타이의 수출을 중단했지만 당시 일본 거래처들이 일반 넥타이를 많이 주문해 주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신뢰에다 지엠의 품질과 디자인이 밑바탕이 된 것은 물론이다. 디자인에 관한 한 윤 사장은 아내와 고생했던 신혼초 추억을 잊을 수 없다. 기획실장을 맡고 있는 아내 이석희 디자이너는 사업초기 윤 사장이 27세때 만났다. 결혼 후 첫 아이를 낳고 신혼 재미가 한창 일 무렵 그는 아내를 일본으로 유학보내게 된다. "유행에 민감한 패션 제품은 디자인이 매우 중요하고 또 디자인은 섬세한 여성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그래서 아내에게 유학을 권했지요." 윤 사장은 당시 젊은 여자가 일본으로 연수를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라며 여권이 나오지 않아 외교부 장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런 저런 사연을 들어 아내가 디자인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지요. 다행히 뜻이 전달됐던지 여권이 나와 아내가 현지로 떠 날 수 있었어요." 갓난 아이를 남겨두고 유학을 가는 아내,낯선 이국땅에서 낮에는 일본 거래처 디자인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디자인스쿨을 다니던 아내…. 당시 힘들었던 시절이 생각나는지 윤 사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아내가 배운 디자인 기술은 그후 지엠의 성장엔진을 가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일본에서 시장조사를 하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유행에 맞는 디자인으로 승부를 건 게 주효했다. "지엠의 넥타이는 국내 고급 넥타이 시장을 거의 휩쓸다시피했어요.그러자 욕심이 생기더군요." 윤 사장은 OEM이 아닌 지엠인터내셔날 이름으로 넥타이를 만들고 싶었다. 자체 브랜드에 대한 꿈을 키우던 중 그는 한 외국 바이어의 소개를 받고 전북 익산에 가게 됐는데 거기서 우연히 매물로 나온 날염 공장을 발견하게 된다. 대지 1천7백평,건평 9백평의 대규모 공장이었다. 욕심이 생긴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 공장을 인수했다. 그러나 그 결정이 화를 불러올 줄은…. 주문이 많거나 적거나 문제가 생겼다. 수출 물량이 많을 때는 불량품도 많고,주문이 없으면 공장을 그냥 놀리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손해가 막심했다. 그는 할 수 없이 후일을 기약하고 2000년 익산 날염공장 문을 닫게 된다. 그 때 얻은 교훈이 '잘하는 것만 하라'는 것이었다. "사업다각화도 필요하지만 자기가 모르는 분야에 문어발처럼 발을 내밀면 결국 잘리고 만다는 것이었죠." 장욱진 기자 sorinag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