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전쟁이다.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인류 문명사의 집요한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듯이.미국의 개전은 만인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후세인이 이라크를 떠나지 않으면 공격할 것'이라고 했던 미국은 다시 '후세인이 떠나지 않더라도 이라크를 공격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번 전쟁이 갖는 가장 뚜렷한 의미는 '전쟁 그 자체를 위한 전쟁'이란 점이다.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무엇이 이 전쟁을 '기필코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만이 충만한 전쟁'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개전 이유에는 뚜렷한 명분이 없어 보인다. 전쟁이 국제적 공감대를 얻는데 실패했다는 얘기다. 정당성도 강하게 부각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유엔의 결정도 이끌어 내지 못했고,국제사회의 지원을 얻는 것도 신통찮았다. 몇몇 국가들은 미국의 행동에 대해 외교적 지지를 표명했으나,그 속을 들여다 보면 반전의 기운이 강하게 퍼져 있음을 본다. 이런 현상은 미국 국내도 마찬가지다. 이런 중에 명확하게 부각되는 점이 있다면 전쟁의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이다. 무기의 생산 및 공급과 관련된 군산(軍産)복합체의 이익,미국의 석유자본이 챙길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적 이익이다. 그리고 그것을 국익으로 포장시켜 주고 있는 것이 미국 외교정책 결정자들이다. 사실 그러한 구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예전에는 외교정책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던 배경적 이익들이 이번 전쟁에는 노골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대체로 외교적 수사에 미숙해 그리 됐거나,혹은 그러한 이유들을 이제 특별히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미국의 힘이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 환각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둘의 결합인지도 모른다. 만약 후자가 주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면,미국은 이제 제국(empire) 건설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는 생각의 단면을 보여준다. 미국 일각에서는 벌써 1945년 이래 전후 국제질서의 판도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것은 엄청난 '국제정치적' 변동을 예감케 하는 대목이다. 제국건설이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좌절되면 좌절되는 대로 그것은 많은 비용과 희생을 동반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싫든 좋든 그 변동의 파고를 일상의 생활에서 겪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제국의 건설로 가든, 파행으로 가든 그 과정에서 우선 나타날 변화는 탈냉전기 10여년 간 지속되었던 국제질서의 변화다. 사실 우리가 탈냉전기라고 명명했던 시대는 국제질서의 특징이나 성격상 명명된 구분이라기보다는 시간상의 구분이었다. 다만 지난 10여년 간 탈냉전기 질서 패턴 중 하나는 그것이 소위 미국주도형 국제협력질서였다는 점이다. 즉 미국이 국제정치적 의제를 설정하고(agenda setting),그것의 국제적 해결을 위해 관련국들의 국제협력을 도출해 내는 방향으로 국제관계가 유지되어 왔다. 그러한 구도의 중심에 미국의 외교가 기능하고 있었다. 지난 90년 걸프전쟁이 그러했고,북한 핵문제도 동일한 접근법이었다. 미국이 정하는 국제현안의 중요도에 따라 문제들이 부각되고 그 해결방식을 미국이 제시하면 관련 국가들이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우리가 상당부분 비용을 부담했던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간 미국은 그러한 국제질서 유지를 위해 외교적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이것이 이번 이라크 전쟁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개전의 이유가 최소한의 정당성도 입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리더십 방식에 변화가 온 것이다. 무형 가치에 기반하는 연성권력(soft power)은 붕괴되고,군사력 중심의 강성권력(hard power)만 남게 되었다. 국제협력에 대한 기대감은 저하되고,상실감이 그 틈을 메운다. 변질된 미국의 리더십과 국제사회의 분열은 21세기 국제관계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라 했던가. 평범한 시민들이 벌이는 평화운동의 세계적 확산이 희망으로 남겨진 시대다. kimkij@yonsei.ac.kr -------------------------------------------------------------- ◇본란의 내용은 한경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