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저자의 이름을 잊었지만 외무고시를 보려면 누구나 교과서처럼 읽던 '서양 외교사'라는 책이 있었다. 그 책을 읽고 느끼던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가 그토록 냉정하게 자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그 머리싸움에서 지면 전쟁이었고 가차없는 불이익이었다. '다른 나라를 봐주기란 없다'는 냉혹함을 알고난 후 그 때까지 별 생각없이 보았던 한·미 공조의 포스터를 다시 보게 됐다. 맞잡은 두 손을 커다랗게 그려놓은 그 포스터는 감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보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그 후 외교관의 꿈을 버리고 영문학을 하기 위해 미국의 중부로 건너갔다. 당시만 해도 학위도 장학금도 얻기 힘들어 누구나 피하던 문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미국인들은 성실하게 도움을 청하면 최선을 다해 도와준다는 것과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는 유학생 수도 적고,한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시절이어서 한번 거짓말 하면 그것이 곧 한국인의 성향을 가늠짓는 것이 됐다. 우리는 성실하게 노력해 장학금도 얻고 학위도 얻으며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 후 몇년이 지나 이번에는 연구년을 얻어 서부로 갔다. 캘리포니아의 버클리대학 교정은 언제나 활기찬 학생들로 넘치고,학교앞 거리는 어쩌다 남과 옷을 똑같이 입으면 큰 모욕을 당했다는 듯이 당장 벗어버릴 것 같은 개성과 다양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교수들도 학생들도 자유와 풍성함 속에서 개혁적인 이론을 마음껏 사유(思惟)했다. 그리고 다시 몇년이 지나 이번에는 동부로 연구년을 떠났다. 입국부터 달랐다. 절차가 까다로웠다. 그리고 교정의 분위기도 서늘하고,서로 간섭하지 않으려는 경계심 같은 것이 엿보였다. 자연만은 변함없이 너그러웠다. 옅어지는 숲을 내려다보던 9·11,뉴욕 무역센터의 테러 참사로 교정은 충격과 침묵에 휩싸였다. 맨해튼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했던 나는 불안해 전화를 계속 걸었지만 불통이더니 며칠 후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 전기 수돗물이 끊어져 전쟁터와 같은 그 곳을 간신히 빠져나와 다른 곳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목숨을 건진 것에 안도하며,한달 후 그 곳을 찾았다. 무역센터에서 두 블록 떨어진 친구의 피자집을 찾아 지하철을 나오자 고무 탄내가 코를 찌른다. 테러 이후 두달이 지났는데도 전선 탄내가 거리에 가득했고,친구의 반지하 아파트 창가에는 닦아도 여전히 남아있는 잿가루가 수북했다. 그 후론 조그만 비행기 사고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미국 사람들을 보게 됐고,비행기 탑승구 앞에서 하얀 러닝 속옷만 입은 채,팔다리를 벌리고 온몸에 금속탐지기가 스칠 때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멀쩡한 신사들을 보게 됐다. 그리고 2주일 전,지난 학기에 원격 화상강의를 함께 했던 인디애나주 볼스테이트 대학의 초대를 받았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비롯한 대표적인 우리 시를 양쪽 학생들이 마주보며 토론할 때,무심코 이쪽은 시의 화자(話者)를 여성으로 보고,저쪽은 남성으로 보는 것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차이는 미국시를 읽을 때도 나타났다. 지구촌 시대에 문화적 차이를 서로 이해하는 것은 소중했다. 학생들이 유학을 떠나거나 연수 갈 때 나는 그들이 그곳에서 느낄 고국의 소중함,특히 "당신은 어디에서 왔는가"만을 묻지 않고,"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다시 물을 때 느낄 서러움을 떠올린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그들은 통일에 대한 염원이 그만큼 더 강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서양 외교사'를 읽고 느끼던 충격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진정한 자존심과 용기는 남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먼저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라는 말도 하고 싶다. 대학가에 즐비한 음식점과 옷가게보다 책방이 먼저 있어야 하고,입시제도만을 나무라지 말고 제도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생각을 가지며,위기 때 앞장설 수 있는 인내와 책임감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기를 원한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이 필요하다"는 말 대신에 "우리는 우리 이익에 과연 누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라"고 전해주고 싶다. tkwon@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