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말 외환위기로 실업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온 국민이 나라를 살리자며 장롱 속 금반지까지 내놓던 시절. 주가가 폭락해 '깡통계좌'가 속출하는 와중에도 부자들은 금리가 오른 덕에 이자수입이 늘어 오히려 재산을 늘릴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빈부 격차가 벌어졌고 서민층의 박탈감도 커져만 갔다. 이 무렵 부유층의 소비행태를 꼬집는 보도가 많았다. 사례 하나. '몰래 카메라'가 서울 강남에 있는 백화점 명품매장을 비춘다. 손님으로 가장한 기자가 점원에게 묻는다. "이 모피코트 얼마예요?" "1억원짜린데요,예물로 잘 나가는 거예요." "더 비싼 것도 있나요?" "2억원짜리도 있는데,진열 안하고 팔아요." 기자의 멘트가 뒤따른다. "외환위기로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지금 일부 부유층은 흥청망청 사치를 일삼고 있습니다." 이 보도는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문제가 있다. 부유층의 과소비를 꼬집는 것은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데도,경제를 튼실하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선 이 뉴스를 시청하는 서민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또 부자들의 소비심리를 위축시켜 주머니를 닫게 할 수 있다. 돈이 돌지 않고 장롱 속에 묻히면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서민들의 몫이다. 최근에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해외에 나가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언론의 표적이 되곤 한다. 해외원정 골프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개인의 소비를 규제하는 법이라도 있으면 모를까,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으로 누를 일도 아니고 누른다고 근절될 일도 아니다. 문제는 대안이다. 부자들이 해외에 나가 돈을 뿌리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 가령 겨울에도 골프를 칠 수 있는 남쪽에 골프장을 많이 지을 수 있도록 불필요한 규제를 풀자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소비심리가 너무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나라 안팎으로 불확실한 변수가 많아지면서 소비자들이 좀체 주머니를 열지 않는다. 이제는 불황이 장기화될까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일부 부유층의 과소비를 질타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부자들이여,지갑을 열라"고 호소하는 편이 낫다. 이웃 일본이 왜 10년 이상 불황에 허덕이는지 생각해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