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원회가 구조조정본부의 해체 필요성에 대한 언급을 시작으로 갖가지 재벌정책 구상을 쏟아내 재계와 신경전이다. 거론되는 구상 중 어떤 것이 최종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재벌정책수단으로 채택될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새 정부가 다룰 가장 중요한 경제이슈가 될 재벌문제에 대해 합리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재벌문제의 본질,그리고 관련된 몇가지 사안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 재벌문제는 '한국 경제문제 그 자체'다. 재벌의 생성 성장 경제력집중 금융 및 정경유착 등 재벌과 관련된 제반 현상과 문제점은 한국경제의 역사적 흐름,역대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와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따라서 재벌에 진정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기업실패'에 못지않게 '정부실패'의 결과다. 재벌은 그간 우리정부가 집착해 온 '고(高)성장 신화'에 대응해서 대기업들이 추구한 '팽창위주의 기업경영'을 위한 최적의 기업구조였다. 거시경제 운영목표를 설정하고 시장에 간여하는 산업정책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고성장 목표를 달성하려고 한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 이후 역대 정부의 일관된 경제운용 기조였고,재벌은 정부의 정책파트너로서 이 경제운용구조에 깊숙이 참여해 왔다. 정경유착도 이 구조의 당연한 소산이다. 세계경제 여건의 변화로 이런 식의 경제운용방식이 그 효용성을 다했고,당연히 시장을 중심으로 정부와 대기업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재설정됐어야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국민의 형평욕구 수용 등 주로 정치적 고려에 의해 재벌규제를 강화하는 정책이 추진돼 왔다. 이 역시 또 다른 '정부실패'였다. DJ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정부는 시장경제의 원리를 경제운용의 기조로 삼고,개별기업 단위의 경쟁력을 기본으로 하는 기업정책을 추구한다고 끊임없이 말해 왔지만,이 정부의 재벌정책은 비시장적 접근의 표본이었다. 이 정부 집권기간 중 재벌구조가 상당히 변화한 것은 사실이나 그 중 바람직한 변화는 정부의 재벌개혁 노력 성과라기보다 IMF체제를 맞아 변화된 경제환경에 대응하는 재벌들의 자기적응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새 정부가 '국제경쟁력 제고란 경제적 당위성에서 재벌이 변화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경제정책의 중점을 거시목표에 집착하는 성장위주로부터 시장기능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두는 구조정책으로 바꾸고,산업정책 중심에서 경쟁정책 중심으로 전환해 경쟁력 있는 기업만 살아남는 기업 환경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진정으로 이런 정책방향을 택하려면 시장에 대한 정부의 역할과 기능,그리고 정부의 조직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보다 투명한 경영을 유도하는 기업정책을 계속 추진하고,금융부문에서 기업신용평가와 여신심사제도를 정비하는 것도 재벌의 변화를 위해 불가결한 선행과제다. '정부실패'부터 먼저 교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새 정부는 정부가 원하는 재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 말한 기업환경은 대기업들이 말로는 원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경쟁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대부분의 우리 대기업들에 사실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되면 그들 역시 국내외적으로 생존하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기업구조를 향해 스스로 변신노력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는 기업들은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벌들은 △이미지를 공유하는 정도의 유연하고 느슨한 연계체제 △공정거래법상 허용되는 지주회사 형태 △재벌구조를 해체하고 완전한 개별 기업단위의 경영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모돼 갈 것이다. 구조조정본부 또는 유사한 기구의 유용성도 이 과정에서 재벌들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탈세나 내부거래 가능성 등 남는 문제가 많겠지만 이에 대해선 엄격하고 예외없이,공정거래법 증권관련법 또는 세법 등 관련법의 해당 조항을 적용하면 대부분은 해소되리라고 본다. 경제력집중억제 제도를 포함한 공정거래법 체계의 전면적인 재편도 이런 방향이 선행된다면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과제다. inkim@shink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