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조만간 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절하)에 대한 검토내용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보고할 예정이라고 한다. 박승 한은총재가 취임 직후부터 "우리나라가 성장을 지속할 경우 반드시 겪어야 하는 문제"라며 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해왔고, 지난 7월부터 한은내에 전담팀을 운영해온 점을 감안하면 별로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당면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이 문제가 과연 그렇게 시급한지에 대해선 솔직히 의문이다. 가뜩이나 국내외 경제 여건이 불안한 터라 더욱 그렇다. 한은측에서는 우리경제의 규모팽창에 따라 거래단위가 커진 만큼 거래편의를 위해서도 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원화의 대외위상이 높아지고 지하자금의 양성화를 촉진하며,중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 심리를 안정시키는 효과도 기대된다고 한다. 물론 우리도 이같은 긍정적인 측면을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디노미네이션은 새로운 화폐발행 외에도 민간기업이 사용하는 회계프로그램 현금입출금기 자판기 등의 교체에 수천억원이 넘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지급결제가 계좌이체나 신용카드로 이뤄지는 만큼 거래단위 팽창에 따른 불편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 게다가 신용사회가 정착된 선진국일수록 경제규모에 비해 현금유통이 많지 않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원화의 대외 위상 제고도 우리나라의 경제력 확대와 통화가치 상승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하자금 양성화 역시 과거 여러차례의 화폐개혁이 실패한데다, 오늘날 같은 개방경제에서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중앙은행 총재가 소신을 갖고 디노미네이션을 중장기 과제로 검토하는데 대해 굳이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10년후를 대비한 장기과제로 검토하는 것'이라면 말그대로 시간을 갖고 조용히 연구하면 될 일이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필수적"이라거나 "남북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견강부회 식으로 강변하며 불필요한 논란을 유발하는 까닭을 납득하기 어렵다. 디노미네이션이 아니라도 한은이 연구해야 할 경제현안들은 얼마든지 있다. 시급하지도 않고 자칫 경제에 큰 혼란을 불러올 수 있는 민감한 문제를 성급하게 공론화함으로써, 공연히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