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돔 쿨트르이문화회관 인질사건은 '문화'란 이름이 붙은 회관의 이름과는 딴판으로 대단히 '비문화적'으로 일단락됐다. 50명의 체첸 테러범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해 본 채 쓰러진 듯하며,이 효율적(?)인 구출작전은 무고한 인질도 1백19명이나 희생시켰다. 환기통을 통해 무슨 가스를 넣었기에 그렇듯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제압이 가능했던 것일까? 며칠 동안 세상을 의심 속에 잠기게 한 다음에야 러시아 당국은 그 약물이 펜타닐과 할로세인의 혼합물이라고 밝혔다. 1997년 국제협약으로 금지된 독가스는 아니라지만,엄청난 독성을 가진 가스를 사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월남전의 고엽제 피해자들을 떠올리자면,이번에 문화회관에서 구출된 6백명의 후유증이 두고두고 어떻게 나타날지 걱정되는 대목이다. 소련 붕괴와 함께 시작된 최근의 체첸전쟁은 이미 여러해 동안 쌍방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차마 글로 옮기기 싫을 정도로 잔인하게 계속돼 왔다. 인구 1백만명도 안되는 체첸인들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저항을 계속중이고,러시아인은 그들 국가의 파산을 막기 위해 군소민족의 독립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러시아라는 국가와 체첸이라는 민족 사이의 갈등에서 계속되는 분쟁이고,세상은 이와 비슷한 국가와 민족 사이의 갈등이 가장 큰 인류사회의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 한 민족이 한 나라를 만든다면,지구는 얼마나 평화스러울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둘은 서로 뒤죽박죽으로 얽히고설켜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실제로 체첸인의 상당수는 러시아라는 나라의 일부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고도 전해진다. 1백만명도 안되는 인구로 독립된 나라를 만들어 보았자 득되는 일이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민족이 뭐길래?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다가도 바로 반세기 전까지 우리 민족이 당했던 비극을 떠올리고 등골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할 때 세상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탈(脫) 민족시대로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우선 지금 세상을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모두 다(多)민족 국가다. 그리고 그들로서는 국가 유지를 위해 그 안의 소수민족을 해방시킬 형편이 아니다. 이번 잔인한 홍역을 치른 러시아를 보자. 인구 1억5천만명의 러시아는 1백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81%를 차지하는 러시아 민족이 주도하고는 있지만,나머지 민족들을 하나씩 해방시켜 주다가는 러시아 그 자체가 거덜 날 판이다. 미국도 형편은 마찬가지여서, 인구 2억7천5백만명은 백인 83.4%,흑인 12.4%,아시아·태평양계 3.3%,인디언 등이 0.8%라고 돼 있다. 작은 단위로 나누면 아마 1백개가 넘는 민족을 헤아린다. 그러니 각 민족을 독립하게 두었다가는 미국이란 나라가 존재할 수 없게 될 판이다. 12억6천만명의 중국 역시 형편은 비슷하다. 한족이 압도적이어서 92%를 차지한다지만,55개 소수민족(한국 만주 몽골 티베트 등)을 독립시킬 처지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처럼 단일민족으로 한 국가를 만들고 있는 나라가 세상에는 극히 드물다. 아니,오히려 우리의 경우는 한민족으로 두나라가 되어 있어서 문제지만…. 그런데 눈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세상은 엉뚱하게 변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유럽연합(EU)이 대표적인 예다. 이미 같은 통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EU는 이제 정치적 통합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EU 대통령'이야기가 솔솔 나오는 것은 다민족국가가 어쩌면 바로 지구의 미래상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미 2백년 전에 철학자 칸트(1724∼1804)는 '영구평화론'을 써서 각 국가가 주권의 일부를 양도해 전쟁을 막는 국제조직을 설치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당시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공통적 꿈이었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그런 꿈이 부분적으로 실현돼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 한편에서는 아직도 인류는 '민족'이란 말의 마력(魔力)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갈등은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며 잔인하게 계속될 모양이다. 어찌 보면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존재다.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