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란게 자연을 가슴에 담는 작업 아니겠어.그래서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지."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80)은 자연을 벗삼아 자기수양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그림의 최대 장점으로 꼽는다. 이 명예회장이 그림에 입문한 것은 지난 90년대 초반. 그룹경영에 집중하느라 도무지 짬을 내지 못하다가 환갑을 넘기고서야 화가의 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예전부터 꿈꿔왔던 일이다. 지난 96년엔 아들인 이웅열 회장에게 경영의 전권을 맡기고 지금은 그림 그리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가 무교동 사옥으로 출근하는 것은 회사 경영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의 화실이 사옥의 맨 꼭대기층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옷차림도 말끔한 기업 총수의 모습에서 벗어나 전형적인 화가 차림으로 바뀌었다. 그는 소재가 궁해지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다. 마음에 드는 풍광을 찾아 수없이 스케치를 한다.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는 작업은 무교동 사옥에서 이뤄진다. 그는 입문 이후 줄곧 일주일에 한차례씩 홍익대 미대 류재우 교수를 초청해 지도를 받고 있다.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에서다. 가끔 며느리나 딸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재미. 피는 못 속이는지 손주들도 그림을 제법 그려 그를 즐겁게 한다. 그는 다작이다. 요즘도 5~6호 크기의 풍경화를 매주 한 점씩 그려낼 정도다. 추상화는 시도해 보기는 했지만 재미가 없어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추상화를 그려보려고는 했지.그런데 아니야.있는 그대로가 진짜지." 그는 특정 이미지나 형상을 강조하는 추상화의 기법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의 "전공"은 풍경화. 자연 그대로를 화폭에 담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물론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저 자연이 좋아서다. 예전부터 자연을 좋아해 등산을 즐겼던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과 더욱 가까워졌다. 스케치 여행을 다니다보니 전국 안 가본데가 없다. 가끔 초등학교 동창들과 봉고차에 몸을 싣고 낚시를 다니는 것도 또다른 즐거움이다. 그는 요즘 그룹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회사일에 관심을 보이면 임직원들이 명예회장의 눈치를 볼까봐 아예 끊고 산다. 김주성 구조조정본부 사장과 일주일에 한번씩 면담은 하지만 회사와 관련된 일은 가급적 들으려 하지 않는다. 회사 일과 그림 그리기를 완전히 맞바꾼 셈이다. "나는 연기처럼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사람이야.노년을 순수하게 보내려는 늙은이라고 기억해줘." 사업과 관련해 누군가 찾아오면 "이동찬 화백"은 이렇게 답할 뿐이다. 정태웅 기자 redae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