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마리 범의 모습.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의 몸이 되어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 대의원들의 강연집을 읽을 때.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산길에 흩어져 있는 비둘기의 깃. 보름달 밤,개 짖는 소리.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중에서) 지난 2000년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대출한 4천9백억원이 북한에 제공됐다고 주장하는 사람과,'1달러'도 준 적이 없다는 사람들. 대출이 청와대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들었다는 주장과,그런 말 한 적 없다는 두 전직 산업은행 총재의 클로즈업 된 얼굴들. 한사람은 현직 고위관리로 재직 중이고,한사람은 이 대출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부와의 마찰로 물러났다니 모두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진실은 하나이니 두사람 중 한사람은 허위증언의 벌을 받게 될 것이 슬프고,'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모습을 보는 듯해 더 슬프다. '공직자의 정치적 중립'은 다수 국민의 지지로 성립된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다수설이고,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불법·비리가 없는 한 공무원을 해직이나 좌천시키지 않고 신분을 보장해야 한다. 대의정치와 직업공무원제도는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이 충실히 집행해야 하는 '다수 국민의 지지로 성립된 정부의 정책'은 절차가 정당하고 내용이 합법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특정정파가 아니라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인 공무원은 절차의 정당성과 내용의 합법성을 명백히 결여한 정책을 거부해야 하고,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처벌받을 수도 있다.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 공무원의 신분보장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한다'는 헌법 제7조의 공허함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의 몸이 되어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는 듯해 더 슬프다. 정부는 '감독·검사에 관해 정보 등을 제공하는 경우'가 '구속성예금 수입·자기앞수표 선발행 등 불건전금융거래행위'와 '금융실명거래 위반과 부외거래·출자자 대출·동일인 한도초과 등 법령위반행위'로 규정('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4조)해,'4천9백억원'대출이 '부외거래·출자자 대출·동일인 한도초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계좌추적'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입법관행상 '동일인 대출한도초과 등 법령위반행위'와 같이 '×× 등'의 형태로 규정하는 것은 '예시적 규정'이고,명시돼야 적용할 수 있는 '나열적 규정'은 보통 독립된 '항'이나 '호'로서 규정한다. 모든 '불건전금융거래'나 '법령위반행위'에 대해 해당여부는 예금자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엄격히 해석해야 하지만,예시되지 않아도 조사대상이 된다고 해석해야 한다. 분식회계가 있었거나 부당하게 관련기업에 지원됐다면 현대상선에 대한 조사도 가능하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을 두고 '부외거래·출자자 대출·동일인 한도초과'이외에는 어떤 법령위반행위도 조사할 수 없다는 축소해석이 '대의원들의 강연집을 읽을 때' 같아 우리를 슬프게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해도 두 전직 산업은행 총재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길이고 공직자의 도리인데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 몰라 슬프고,'진실'을 밝히기 위해 계좌추적은 필요하고 가능한데도 불가능하다니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를 듣는 것 같아 더 슬프다. 남의 얘기는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거나 '보름달 밤,개 짖는 소리'정도로 들을까 정치가 뒤덮은 가을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mskang3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