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은 정말 떠올리기 싫은 해다. 천당 직전까지 갔다가 단숨에 지옥 근처로 추락한 한해로 기억된다. 당시 금성사(Gold Star) 미국 현지법인에서 세일즈 마케팅 책임자로 근무했었다. 미국에서 금성(Gold Star) 브랜드를 단 가전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TV는 연간 70만대,VCR이 연간 60만대 판매됐고 전자레인지의 경우 미국 시장점유율이 1위로 1백만대 이상 팔려 나갔다.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로 미국 소비자의 호응은 대단했다. 그러던중 회사가 VCR 신제품을 개발해 내놓았다. 절호의 찬스다 싶었다. 고객을 경쟁사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조급함과 욕심은 당연했다. 전화통에 불이 났다. 미국 대형 백화점 등에서는 "언제 납품할 수 있느냐"며 독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평택의 VCR공장에 거의 매일 국제전화를 해댔다. VCR 생산실장에게 "내가 책임질 테니 무조건 빨리 선적해 달라"고 반강제적 억지를 부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신제품에 대한 반응이 좋아 미국 대형 백화점,대형 할인매장 그리고 전문 전자상가등에 무려 60만대를 납품하는데 성공했다. 뿌듯했다. 승진가도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첫 제품이 출하된지 약6개월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반품이 들어오는게 아닌가. 심상치 않았다. 반품은 한두대가 아니었다. 부랴부랴 서비스센터를 동원해 반품 원인분석에 들어갔다. 원인은 VCR이 재생되는 동안 테이프 작동이 자주 중단되고 되감기가 되는 것이었다. 테이프를 넣어 플레이시키면 테이프 끝부분에 하얀색의 선을 센서(Reel Senser)가 감지해야 하는데 작동불량이었다. 일본에서 수입해 쓰던 센서의 10%정도가 불량품이었던 것이다. 큰 일이었다. "품질불량 전염병"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불량품 뿐만 아니라 정상품까지 반품됐다. 본사에선 난리가 났다. "60만대를 판매했다"는 영업성과가 품질불량이라는 소비자들의 입소문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였다. 승진가도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대신 지옥행 티켓이 손에 쥐어졌다. 며칠밤을 뜬눈으로 지샜다. 방한구석엔 밑바닥을 드러낸 양주병들이 나뒹굴었다. 고민 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종 제품에 대해 전량 리콜을 결정했다. 당시 한국기업으로서는 최초일 듯한 대량 리콜이었다. 그후 3년여에 걸쳐 판매수량의 반이상을 반품 받아야 했다. 원래 신제품이 나오면 출시전에 보통 1주일에서 한달동안 철저한 신뢰성 테스트를 거쳐야 했으나 이를 어겼다. 5센트하는 부품에 대해 정상적인 테스트만 실시했어도... 엎질러진 물을 쓸어담을 순 없었다. 너무나 "기본적인 절차"를 무시한 탓에 수천만달러 이상의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던 것이다. 리콜로 제품품질을 끝까지 책임지는 기업이라는 이미지와 고객과의 신뢰구축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얻었으나 "그때 그 사태"는 아직도 뇌리에 박혀있다. "모든 일은 기본과 원칙에 철저해야 한다"는 교훈이 지금의 확고한 경영신념으로 자리잡게 한 뼈아픈 일화다. 정리=김홍열 기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