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huy91@hanmail.net TV에서 ARS로 모금한다는 자막이 뜨기 시작한 게 몇 년 전부터일까. 내가 화면 위쪽에 자그맣게 쓰인 그 전화번호를 처음 발견한 건 어떤 고약한 병에 걸린 아이를 보며 눈물을 훔치면서였다. 그 아인 우리집 녀석만 했는데 낫기 힘든 병에 걸려 풍선처럼 부은 자그만 몸에다 링거줄을 잔뜩 매단 채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아이 부모는 전세금까지 다 빼서 치료비로 써 버려 아이 몸이 나아도 돌아갈 집이 없는 상태인데 지불해야 할 치료비는 아직도 태산같이 쌓여 있는 듯 했다. 중태에 빠진 아이와 그 곁에서 심신이 다 짓물러 있는 아이엄마를 보다 방에서 만화책을 읽던 우리집 녀석을 불러내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했다. 화면을 보며 어미 말을 듣던 녀석이 쟤네 엄마 진짜 불쌍하다며 자못 심각해졌다. 녀석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뒤부터 죽,어떤 엄마든 자기 아이한테 아픈 일이 생기면 엄마가 세상 살기 힘들다고,그러니 너도 엄마 불쌍하게 안 만들려면 항상 조심하라고 협박조로 설파해 왔던 결과였다. 화면에 떠 있는 번호를 누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저 친구한테 도움이 되는 모양이라는 말을 듣고 난 녀석이 전화를 두 번 걸고 나더니,한 번은 아픈 친구거고 한 번은 세상 살기 힘든 친구 엄마거라는 말을 제법 의젓하게 했다. 모처럼 뿌듯해져서 아직 아기인 줄 알았는데 마음이 엄마보다 더 커버렸다고 칭찬하며 녀석 엉덩이를 한참이나 다독여줬다. 그때부터 녀석은 TV 화면에서 모금번호만 발견하면 신이 나서 전화를 걸게 됐다. 한 가지 놀이가 돼 버린 것이다. 덕분에 나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때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가책에서 슬그머니 발을 뺄 수 있었다. 은행까지 가지 않고도,푼돈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도,자식교육까지 병행할 수 있게 된 셈이잖은가. 다 좋은데 문제가 없지는 않다. 요즘같이 비나 바람이 길게,큰 사건을 일으켜 텔레비전 화면에 모금 전화번호가 사라지지 않는 달의 전화요금 때문이다. 내 수준으로는 전화요금이 경악할 정도로 치솟아올랐던 몇 번의 경험 뒤 리모컨을 장난감 총처럼 쏘아대는 녀석이 "어! 전화해야겠네"할 때마다 부끄럽게도 오금이 저린다. 그 알량한 심사라니. 체면이 있어서 차마 말리지 못하고 녀석과 화면 속 수재민과 창 밖을 번갈아보며 한숨만 쉴 뿐이다. 오늘도 징그러운 비가 또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