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베이징 톈안먼 광장 서편에 있는 인민대회당에서 조선족 출신으로 최고위급인 중국 인민협상회의(공산당 이외의 사회단체와 소수민족 문제를 협의하는 기구)의 조남기 부주석(부총리급)을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는 충북 청원에서 태어나 12살 때 중국으로 가서 6·25전쟁에서는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해 큰 역할을 해 중국 인민해방군 최고계급인 상장까지 오른 인물답게 풍모도 당당했다.

따뜻하게 대해주며 한·중 관계의 여러 가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도 했고 기념촬영도 했다.

당시는 남쪽으로 먼저 온 장길수군 친척들이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진입했다가 중국공안에게 끌려 나온 직후 중국과 일본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세계적인 뉴스가 되고 있던 때였지만,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도 없었다.

면담을 마치고 나올 때 일행중 한명이 "저 사람은 중국의 인민해방군 사령관 팽덕회와 함께 6·25전쟁에 참전한 원수였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방을 하고 있다. 남북한 양쪽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귓속말을 했다.

지난 1992년 한·중 수교는 'Look forward to'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한다. 장쩌민 주석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외교관례를 따르지 않고 동작동 현충탑에 헌화하지 않았고,우리의 대통령도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탑에 헌화하지 않았다.

이러한 원칙은 '같은 것은 구하고 다른 것은 그대로 둔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정신으로 이어 오고 있다고 한다.

지난번 스페인대사관에 들어간 탈북자는 신병인도를 요구하지 않고 필리핀으로 추방하는 형식을 통해 서울로 오게 한 중국 외교부가 이번에는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영사부에 들어온 탈북자 4명에 대해 신병인도를 요구하고 나서 어딘가 꼬여가고 있는 느낌이다.

굶어죽지 않으려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에게 '인도적'차원의 처리가 돼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우리 대사관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북한인민군 장교 출신의 어떤 탈북자가 우리의 대사관과 영사관에 세번이나 망명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베이징에 주재했던 어떤 언론인은 우리 공관에 그런 분위기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탈북자들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남쪽에서는 월드컵을 개최해 첫승으로 열광하고 있는데,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북쪽에서는 주민들이 기아상태를 벗어나지 못해 탈북자들이 줄을 잇고 있다.

남북정상이 만나 '6·15 공동선언'을 하고서도 아직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남의 나라에서 동족을 밀고 당기며 세계의 뉴스거리가 되니 민족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고 1백만명의 사상자를 냈을 뿐 아니라, 5백만명의 이산가족을 발생시킨 6·25전쟁은 너무도 비참했다.

우리 민족에게는 견디기 어려웠던 엄청난 비극이었고 시련이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매달릴 수 없었다.

'Look forward to'원칙과 '구동존이'의 정신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와 불행을 가져다 준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고,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6·25전쟁과 그것을 일으킨 사람들을 잊어서도 안되고 잊을 수도 없다.

우리가 그들을 용서한다 하더라도 역사의 심판은 면할 수 없다.

오늘은 6·25전쟁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념하는 현충일이다.

우리는 지금 '주적(主敵)'이 누구인지를 두고도 혼돈에 빠져 있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들은 '6·25전쟁에 참전한 원수'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옛날 학창시절 뜨거운 여름 운동장에서 반공을 외치며 부르던,지금은 점차 잊혀져 가는 '6·25의 노래'를 조용히 불러본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어제의 중국과 북한은 누구였고,지금 그들은 누구인가.

mskang36@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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