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새벽을 조금씩 거두는 여신은 금빛 마차를 타고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무엇이든 한낮의 권좌에 오르기 전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순간 햇살은 이미 창 앞을 가득 메운다. 나는 웅크린 어깨를 펴본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찾은 미국은 언어만 낯선 게 아니라 사람들의 표정이나 삶의 방식도 낯설다. 영어가 서툴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던 옛날이 아니고,가구 없는 아파트란 거의 없던 옛날이 아니다. 등을 밀어내는 것 같은 기분 속에서 그나마 누울 자리를 마련하고 "곧 돌아갈텐테,뭐"라고 뇌이면서 식당에 혼자 앉아 밥 먹고 도서관만 들락거렸다. 어제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는데 벽의 한 구석에 '고(go) 오렌지'라고 씌어 있어 누구를 말하는 건지 한동안 생각했다. 흰색도 검은 색도 아니면? 그랬더니 누군가 일러준다. '지중해의 오렌지인가 봐'-.하긴 뉴욕의 쌍둥이 건물이 무너지고 두달이 채 안됐으니…. 책과 잡동사니를 파는 학생회관의 서점 앞을 지나는데 문득 노란 색깔이 눈을 끈다. 일본 문화를 상징하는 접 부채와,인도와 아랍문화를 상징하는 물건들 사이에 한 여자가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서 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보는 한복이다. 나는 커다란 유리창 뒤에 서 있는 그 미국여자의 앞가슴을 올려보았다. 시간도 없는데 모른 척 그냥 지나갈까,아니면 들어갈까. 그런데 아무리 바빠도 저건 아니다 싶었다.그 마네킹은 목을 시원스레 내놓고 노란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고 있었다. 옷고름은 리본처럼 양쪽으로 갈라 핀으로 고정시켰다. 뒤가 터진 치마를 넓게 벌려 서양 파티복식으로 한복을 입혀 놓았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옷고름 이야기를 했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주인 남자는 2층 사무실로 가보라고 말한다. 나는 각 나라 문화교류를 주관하는 여자와 함께 다시 내려와 노란 저고리 앞으로 갔다. 목을 드러내느라 고정시킨 핀들을 뽑아내 저고리를 다시 입히고 나서 옷고름 매는 법을 그 여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치마도 잘 여며주어 서양 마네킹에다 정숙한 조선 여자의 티를 담뿍 내었다. 그 여자의 방에는 오누이처럼 다정한 한국인 남매사진이 벽에 붙어 있었다. 사내아이는 부산에서,그리고 여자아이는 또 다른 곳에서 입양했는데 남매처럼 다정해 보였다. 아이들의 조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그 여자는 한국에 대한 자료들을 서랍 속에서 꺼냈는데 사진이 실린 화보가 전부였다. 그 책자 속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일을 보고 있다. 아마 88올림픽을 위해 미국 각 지역에 보낸 자료 같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갖고 있는 자료는 약 20년 전의 화보와,아주 오래된 한복 한벌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전해 받은 징표 같은 것이었을까. 그 옷과 그 사진으로 눈이 파란 부모들은 검은 머리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기르고,아이들의 조국에 대해 생각하고,그 애들이 잘 자란 뒤,자신의 뿌리를 자랑스럽게 찾기를 바랐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나무가지 틈새로 찾아오는 새벽의 여신 앞에서 나는 하루에 한번씩 e메일을 열어보았다. 서울이 밤이면 오하이오주는 낮이었다. 밤과 낮이 반대이기에 늘 아침에 한번 열어보면 그만이다.서울에는 내게 한밤중에 일어나 e메일을 보낼 사람이 없었고,미국엔 e메일을 보내줄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여자가 e메일을 보냈다. 추수감사절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행복하게도 나는 갈 수 없었다. 바로 그 노란 저고리 일이 있은 후 나는 갑자기 바빠졌다. 그리고 의외로 이곳에 한국에서 살다온 미국인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았고,그들이 폭탄주도 마셔보았고,"아줌마 여기 찌개 쪼금 더 주세요"라는 말을 여전히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것도 알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이미 초대했기 때문이다. 새벽의 여신은 노란 저고리를 입고 나를 찾아왔던 것일까,먼저 손을 내밀면 반갑게 잡아주는 것이 그들이었기 때문일까,아니면 옷고름을 고쳐 매던 손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읽었기 때문일까.'고 오렌지'에 가슴이 두근거리던 때가 언제 있었느냐 싶게 나는 그들과 어울렸다. 더 이상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다음 겨울엔 그 마네킹이 너덜너덜한 소매가 아닌,잠자리 날개 같은 고운 한복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