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마켓이나 할인점에 가지런히 진열된 상품들. 바코드를 긁어 나온 계산서에 신용카드를 내밀기 지겨워지면 재래시장으로 가자. 넘쳐 흐르는 정(情)을 느끼러,사람 내음을 맡으러 잠시 도심을 떠나 보자. 봄볕이 제법 따갑던 지난 21일. 지하철 8호선 모란역 일대는 몰려드는 차량과 사람들로 닷새만에 다시 북새통을 이뤘다. 모란장 초입에 닿기까지 스쳐 지나는 인파(人波)를 타고 온기가 전해져 왔다.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갔던 옛날 시골 장터의 향취였다. 국내 최대의 재래시장인 성남 모란장은 4자와 9자로 끝나는 날마다 열린다.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의 대원천 하류를 복개한 3천3백여평 장터엔 1천명이 넘는 상인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없을 건 없답니다"라는 노랫말이 절로 나올 것만 같다. # 소 돼지 빼곤 다 있어요 "멍 멍 왈왈왈!"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견공(犬公)들이 첫인사(?)를 한다. 한 근에 5천~6천원이란다. "바도른가 바르돈가 하는 여자 때문에 한동안 걱정이 많았는데 요즘엔 그래도 형편이 나아졌어요.수천년 내려온 우리네 음식문화를 놓고 지가 뭔데..."라고 한 상인이 말했다. 모란장 우측지역에 자리잡은 가금(家禽)부의 주인공을 견공들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흑염소 오리(흰오리 천둥오리) 닭 병아리 토끼 등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동물의 천국"에 온 느낌. 겨울엔 꿩과 토끼가 많이 나가는데 반해 봄 여름엔 오리와 닭이 잘 팔린다고 한다. 한마리에 6천원인 오리는 불고기나 도리탕으로 요리하기 쉽게 즉석에서 살을 발라준다. 그래도 동심(童心)은 애완견이나 귀여운 강아지에 있나 보다. 장 안쪽에 마련된 강아지 장터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봄볕에 꾸벅꾸벅 조는 강아지를 연신 깨우는 동심은 일부 어른들의 다른 관심사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 술 안 권하면 왕따당해요 재래시장의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해도 먹거리 장터. 가장 붐비는 곳이다. 모란장 중앙 가장 좋은 자리에도 40여명의 상인들이 먹거리를 팔고 있다. 흡사 포장마차를 한데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메뉴의 다양성이나 혀에 착착 감기는 맛은 도심에선 경험하기 힘든 것이다. 요기거리론 장터국수 칼국수 만두국 등이 인기다. 물론 홍합탕 꼼장어구이 가오리찜 낙지무침 돼지껍데기볶음 오징어무침 대하탕 쭈꾸미무침 명태조림 꽁치구이 등 안주 거리도 20여가지에 달한다. 푸짐한 먹거리 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바로 넘쳐나는 인심이다. 막걸리 한사발을 시켜 놓고도 말만 잘하면 안주는 공짜로 먹을 수도 있다. "음식 대신 인심을 판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손님들끼리 서로 술 권하는 것도 전혀 이상할게 없다. 한 두 마디 나누다 보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라도 술친구로 변해 버리곤 한다. 태평동에 사는 김용덕(43)씨는 "아줌마들 손이 크고 음식도 깔끔해 자주 찾는다"며 "약간 취한 것 같으면 술을 팔지 않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건네 오는 소주잔을 정중히 마다하자 대뜸 "괜찮아 이거(소주 1병과 오징어 무침 1접시) 다해봤자 8천원도 안돼는데 뭐"라고 말한다. #홍화씨 기름도 짜드려요 구경거리도 빼놓을 수 없는 모란장의 매력이다. 얼마전만 해도 모란장에선 약장수들이 주로 구경꾼들을 모았지만 요즘엔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다기능 상품이나 건강식품을 파는 보따리장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하지만 물건만으론 시선을 끌수는 없는 법. "톱 중의 톱 만능 톱"이란 현수막을 내걸고 사용법을 설명하는 상인의 손끝에 20여명의 눈이 쏠렸다. 일반톱과 달리 자유자재로 휘는 톱날은 마치 고무 같았다. 만능톱은 대못을 순식간에 두 동강 내기도 하고 각목을 물결 무늬로 잘라 버리기도 했다. 여기 저기서 감탄사가 연발했다. 건강에 좋다는 홍화씨 기름을 즉석에서 짜서 파는 상인도 비장의 장기를 선보였다. 화투 흑싸리와 단풍를 보여준 뒤 입김을 불자 흑싸리가 단풍으로 변했다. "장땡"이 돼 버린 것. 눈 속임인줄 알면서도 구경꾼들은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묘기에 힘입어서인지 2만원짜리 홍화씨 추출액도 한통 두통 제법 팔려 나갔다. # 뭐니뭐니해도 사람구경이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떨이요 떨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못 팔면 닷새를 묵혔다 팔아야 하는 상인들의 고육책일까. 3시간 전만해도 마리에 1만원하던 민물게가 5천원이나 내렸다. "내일은 안산장(5,10자로 끝나는 날에 열림)에서 새 물건으로 시작해야죠.하루 묵히느니 손해를 좀 보더라도 떨이를 해야 돼요." 경기도 광주에서 왔다는 김행선(54)씨는 "그날 물건은 그날 모두 파는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찬거리를 사러 나온 주부들의 발걸음도 상인들의 마음처럼 바빠졌다. 검은 비닐읒嗤?양손에 몇개씩 든 주부들은 얼굴에 넉넉함이 묻어 나왔다. 손이 홀가분한 주부들도 즐거워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별로 산게 없으신 것 같은데 얼마나 쓰셨어요?"라고 묻자 성남에 산다는 안영임(59)씨는 "낙지 한 소쿠리(10마리)랑 티셔츠 하나를 샀는데 2만원밖에 안 들었네요"라고 했다. "그냥 사람 구경이나 하면서 칼국수 한그릇 먹으러 나왔는데... 그래도 많이 산 거예요"라는 안씨의 말처럼 모란장의 가장 큰 묘미는 사람 구경에 있는 것 같았다. 닷새 뒤엔 또 모란장에서 서민들의 삶의 활기가 넘쳐날 것이다. 경기 회복의 훈풍이 아직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서민경제의 힘이 강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글=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