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전 세계는 경제대국 '일본을 배우자'는 열풍으로 가득했었다.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위세에 눌려 선진국들조차도 기를 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일제 자동차가 미국 유럽의 거리를 누비고 전자제품이 백화점 매장을 석권하다시피 했다. 경영학의 원조랄 수 있는 미국의 유수한 대학들은 일본 기업의 성공사례를 다투어 강의하고,일본 기업인들을 초빙해 경쟁적으로 강연회를 가졌다. 콧대 높은 미국의 자존심도 일본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많은 우리 기업 총수들 역시 일본에서 신년을 맞으면서 '도쿄구상'을 내놓곤 했다. 좀체 기울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일본이 벼랑 끝에 몰려 신음하고 있다.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면서 일본경제가 침몰할 것이라는 '3월 위기설'이 또 나돌아서이다. 과거에도 여러 번 위기설은 대두됐지만 이번 만큼 일본열도를 떨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서방언론들은 일본주식회사의 운명을 카운트 다운하듯 '공황''슬픔' 등의 용어를 쓰면서 위기를 진단하는 분석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영국인 알렉스 커가 쓴 '치명적인 일본(원제:Dogs and Demons)'이라는 책이 관심을 끌고 있다. 저자는 세계가 왜 일본을 말기암환자로 진단하는가를 문화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일단 틀이 정해지면 정치든 경제든 문제가 있어도 침묵하고,정부와 기업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할 수 있다는게 일본의 속성이라는 비판이 예리하다. 또 과거 10년간의 경기침체를 장밋빛 전망으로 덮고,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서도 전쟁에 이기고 있는 것처럼 뻔한 진실을 호도하려는 심리가 일본의 치명적인 병리현상이라는 점도 돋보인다. 게다가 경직된 관료주의,지난 10년간 총리가 11번이나 바뀌는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 등도 심각한 현안으로 지적된다. '잃어버린 10년'으로 90년대를 보낸 일본의 경기침체가 언제 종지부를 찍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이 경기침체의 수렁에서 계속 허우적댄다면, 이웃인 우리로서도 이만저만한 걱정이 아니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