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 오사마,헬로 켄(Bye Osama,Hello Ken)' 월스트리트저널 자매지인 금융주간지 배런스의 최신호 권두 칼럼제목이다. '9·11'이후 미국인들사이에 가장 많이 회자됐던 '오사마 빈 라덴'은 이제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조차 언급되지 않는 반면,케네스 레이 엔론 전 회장이 무대 중심에 섰다는 뜻이다. 미국은 요즘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열기가 한창이지만 속으로는 엔론사태가 점점 곪아가고 있다. '엔론염증(Enronitis)'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레이 전 회장 등 경영진들이 의회청문회에서 수정헌법 5조(묵비권 조항)를 들며 침묵을 지키는 모습은 염증이 쉽게 아물지 않을 것임을 예고해준다. 염증확산에 대한 우려는 등장인물의 화려함이나 제2,제3의 엔론 발생가능성 때문이 아니다. 미국 경제규모에 비하면 엔론 같은 회사 몇개가 문을 닫아도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정치인에 대한 의혹도 미국인들에게는 식상한 뉴스다. 진짜 문제는 염증이 커지면서 미국인들의 증권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우려다. 증권시장은 매출 이익 부채 등이 오로지 '숫자'로만 움직이는 시장이다. 기업들이 제시하는 숫자를 믿을 수 없다면 시장의 기본이 흔들리게 된다. 미국의 주식투자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는 등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숫자에 대한 신뢰'때문이다. 이런 신뢰가 미국인들의 돈을 증시로 모았고,이 돈이 다시 미국 기업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최근 엔론과 함께 문제가 된 회계법인 아더앤더슨의 고문으로 영입된 폴 볼커 전 연준리(FRB) 의장이 "미국의 회계감사제도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 말도 숫자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갤럽 여론조사 결과 성인들의 절반 이상이 "대기업들 대부분이 숫자를 조작할 것"이라고 응답하고 있다. 미국 금융사 전공인 찰스 가이스트 맨해튼대학 교수는 "1929년 대공황 때 잃어버린 증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데 꼬박 20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엔론 염증이 오랫동안 증시의 무기력증으로 전이될지 모른다는 얘기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