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으로 덮인 새벽길을 걸으며 임오년을 맞았다. 눈내리는 길 따라 어딘가 무작정 떠나고 싶어지고,무엇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진다. 눈꽃이 핀 감나무아래 소복이 눈덮인 고향집 사랑채의 설경이 눈에 선하고,발이 시리도록 강변의 눈길을 걷던 옛사람이 그리워진다. 눈덮인 하얀 세상에는 평화가 내리고,눈빛에 바랜 하얀 마음에는 그리움이 흐른다. 강산이 반이나 변할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다. 부도위기로 치닫고 있는 나라경제를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있을 때 선배 한분이 ''청설간서(聽雪看書)''라는 액자를 하나 보내왔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에게 ''눈 소리를 들으며 글을 읽어라''-.다가올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망중한(忙中閑)의 여유를 위해 벽에 걸었다. 온갖 노력과 수단을 다했지만 ''IMF사태''는 오고 정권은 바뀌어,"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불을 끄러 온 사람이 누구인지,그리고 불을 끈 사람은 누구인지….IMF가 축복인지 저주인지,크리스마스에 찾아 온 산타클로스인지 마귀인지….잘하면 IMF는 축복이 될 것이요,산타클로스가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공직을 떠났다. ''청설헌(聽雪軒)''이라 이름지은 방에서 그 액자의 예언대로 ''청설간서''하며 세월을 살았다. 책을 읽으며 글을 쓰며 살아가는데,세상은 나 없이도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갔다. 눈이 오는 날이면 몸과 마음을 낮추고 잔잔한 호수가 되어 눈 소리를 들으려 애썼지만 바람소리만 들렸다. 때로는 미련이 남아 스치는 바람결에도 마음은 흔들리고 술 한잔에 취하기도 하면서 ''청설간서''의 세월은 몇해가 흘러갔다. 어느 날,정부가 하는 일과 다른 뜻을 담은 글을 신문에 쓰게 되었는데 ''공직에 있었던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는 비판의 소리가 들려왔다. ''초야의 백수''가 한마디 해 본들 무슨 영향이 그리 크겠느냐고 하면서 옳다고 생각하면 소신대로 밀고 나가면 될 게 아니냐고 말해줬다. 하기야 공직에 있을 때 내가 하는 일을 비판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흘러가는 소리라도 잘한다고 하면 기분이 좋았고 옳은 소리라도 쓴 소리를 하면 이리저리 반박논리를 갖다 대기도 했고 그래도 자꾸 그러면 미워지기도 했다. 성경에서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그가 너를 사랑하리라''고 했다. ''청설간서''하며 살다보니 공직자는 거슬리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며,그럴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슬리는 소리를 들을 때가 거슬리는 소리를 할 때보다 낫다는 것을 ''백수''가 돼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눈보라가 휘날리는데 바람소리만 들린다. 아무리 귀가 밝아도 눈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눈 소리는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내 몸과 마음이 눈 소리 같이 고요하고 작아지면 눈 소리는 들릴 것이다. 어릴 때는 밤새 눈이 와 온 세상이 하얗게 되면 간밤의 잠결에 ''소복소복''하는 눈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세상일에 피로해진 ''육신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눈 소리가 호수 같이 고요해진 ''영혼의 귀''로는 들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육신의 귀로만 듣는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같은 소리라도 ''거만한 육신의 귀''에는 ''미움''의 소리로 들리지만 ''지혜로운 영혼의 귀''에는 ''사랑''의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청설''하고 ''간서''하는 세월을 사노라니 잔잔한 평화와 따뜻한 사랑이 내리고 ''육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영혼의 귀''에 들리는 ''소리 없는 말들''이 들리는 것을 느낀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우리를 슬프게 하는 사건들이 하도 많아 사건이 사건을 덮고 가더라도 분노하는 말없는 다수의 소리가 눈 소리 같이 교교히 ''영혼의 귀''에는 들린다. ''육신의 귀''에 거슬리는 민초의 소리를 잘 듣고,더 나아가 눈을 듣는 마음으로 ''영혼의 귀''를 열고 ''말없는 다수의 소리''를 듣는 공직자가 많아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많이 좋아질 것이다. mskang36@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