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불황은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버블(거품)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며 버블붕괴가 아니더라도 불황은 닥쳐 왔을 것이다. 구조적 문제의 하나는 높은 저축률이다. 높은 저축률을 바탕으로 완전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수준의 투자가 따라 주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노동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 판에 높은 투자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일본의 저축률은 아직도 고공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 정책당국자들은 불황 치료에서 90년대 전반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대장성(현 재무성)이 경기후퇴의 위험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금리를 인하하고 인플레를 유도했어야 했다. 하지만 박력도 없고 통찰력도 없는 대장성은 절호의 찬스를 놓쳐 버렸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정치가들이 정책 변경에 훼방을 놓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일본이 현재 금융시스템을 재건한다고 안간 힘을 쓰지만 나는 제대로 이뤄질까에 대해 회의적이다. 지난 94년에 철저한 금융개혁이 이뤄졌다면 지금과 같은 시스템 마비현상은 없었을 것이다. 일본 경제는 현재 금리를 아무리 인하해도 약발이 먹히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다. 때문에 금융이건, 재정이건 정책적 선택여지가 거의 없다. 디플레가 더 심화되면 국민들은 지갑을 더 단속하게 되고 대출에 관심을 두려 하지도 않는다. 물가 하락에는 가속도가 붙고 불황은 본격적인 파국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유동성 함정과 디플레 늪에서 일본 경제를 구출해 내는 길은 인플레 정책 밖에 없다. 실질금리를 바람직한 수준까지 끌어 내려야 한다. 일본이 디플레 수렁에서 그토록 허덕인 것은 적극적 재정정책이 일본을 구출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나 재정정책은 경제가 공황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아줄 뿐이다. 명목 금리가 제로(0)에 가깝지만 실질 금리가 이보다 더 낮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들에게는 장래 인플레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다면 유동성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본 은행이 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카드는 공개시장 조작이나 외환시장 개입을 통한 인플레 유도다. 외환 시장에 쏟아 부은 엔화를 회수하지 않는 방식으로 엔화약세를 유도하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통화공급을 늘리는 방안 등이 고려될 수 있다. 인플레율이 연간 5%에 달한다 해도 일본경제는 감당해 낼 능력이 있을 것이다. 내가 정책 결정권자라면 4%라는 비교적 높은 수준의 목표를 택하겠다. 하야미 마사루 일본은행 총재는 금융완화가 살인적인 인플레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이는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대공황이 시작된 1931년에도 물가가 연간 10%씩 떨어지는 상황에서 인플레를 걱정한 뱅커가 있었는데 지금의 하야미 총재가 바로 그같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정리=양승득 도쿄 특파원 yangsd@hankyun.g.com .............................................................................. ◇이 글은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가 일본의 시사월간지 주오고론 최신호(2002년 1월)에 기고한 '일본경제의 해법'이라는 칼럼을 정리한 것입니다.